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홍정대(紅鞓帶)는 고려시대 문관 4품 이상, 상참(常參) 6품 이상이 공복에 착용했는데, 문관 4품 이상은 금어(禁漁)를 패식했고, 상참 6품 이상은 은어(銀魚)를 패식하였다. 정대는 홍정대의 준말로 예복에 딸린 빨간 가죽띠를 말하며 공복에 띠도록 하였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에는 홍정장(紅鞓匠)의 관장은 보이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는 1425년 공조에 있는 각색 공장인(工匠人) 수의 조정에 관한 공조의 계 기록에서 “본조에 소속되어 있는 각색 공장인은 원래 그 임무가 긴급하고 완만함에 따라서, 이미 전에 인원의 필요 수를 참작하여 정하였던 것이오나, 이제 액수 안에서도 부족한 자가 꽤 많으니 양민이고 공천(公賤)이고 별호(別戶)의 사천(私賤)이라도, 재주 있는 자는 각색 공장이 스스로 고하여 채워 정하게 하고, 번을 갈아 일에 나오게 하되, 그중에 금박(金箔)장이와 연금(鍊金)장이와 나전(螺鈿)장이와 붓장이와 도장장이와 홍정(紅鞓)장이 등은 사사로이 배운 자가 없으면, 각 관청의 노자(奴子)로 정한 숫자 외에 수를 더 늘여 견습생으로 두었다가, 그 궐원(闕員)이 생기는 대로 숫자를 채우게 하고,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게 하소서.”라 나와있다[『세종실록』 7년 4월 28일]. 1450년에도 ‘면복도 또한 부득이하여 입으니, 마땅히 대홍흉배(大紅胸背)와 홍정삽화옥대(紅鞓鈒花玉帶)·감금흑화(嵌金黑靴)를 착용’하고 [『문종실록』 즉위년 6월 5일], 또 같은 해 ‘사신이 장차 이르려 할 제 임금은 청라(靑羅)의 흉배(胸背)와 홍정과 소옥대(素玉帶) 차림으로’라는 기록이 있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3일]. 1452년에는 노산군이 아청곤룡포(鴉靑袞龍袍)·익선관(翼善冠)·홍정옥대(紅鞓玉帶)·흑화(黑靴)·길의장(吉儀仗)으로 나와 맞았다[『단종실록』 즉위년 윤9월 17일]. 또 1470년에는 왕이 익선관·아청곤룡포·홍정·소옥대를 갖추고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서(詔書)를 맞이하였다[『성종실록』 1년 5월 1일]. 1521년에는 그중 옥대(玉帶)는 선대(先代)에서 쓰던 것을 내부(內府)에 간직하였던 것이며, 황정(黃鞓)은 번왕(藩王)의 의장(儀章)이 아니라 하여 홍정으로 바꾸었다[『중종실록』 16년 5월 1일]. 따라서 홍정장은 왕의 옷에 띠는 붉은 가죽 대를 만드는 장인임을 알 수 있다.
[변천]
장인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이며 제도적으로 나타나는 공장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고려시대의 공장은 세습제로서 중앙의 각 관아에 갖가지 명칭으로 소속되어 있었으며 소속 기관에 따라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다. 공조서(供造署)는 왕이 사용하는 장식품의 제작을 담당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홍정장의 관장은 보이지 않으나, 홍정장을 비롯한 장인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특히 능라장(綾羅匠)은 북경 가는 사행길을 따라가게 하여 대홍(大紅), 초록 등 여러 가지 색깔의 저사(紵事) 염색도 익히고 직조도 익혀서 가져오게 하거나 무기 제조술을 배울 수 있게 청하는 외국 기술 연수 기회를 부여하는 일도 있었다[『연산군일기』 8년 1월 12일], [『고종실록』 17년 7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