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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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注匠)

서지사항
항목명주장(注匠)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공장(京工匠), 공장(工匠), 관장(官匠), 사장(私匠), 외공장(外工匠), 장공인(匠工人), 장인(匠人)
관련어주성장(鑄成匠), 주장(鑄匠), 주철장(鑄鐵匠)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쇠를 녹여 붓는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 주장(注匠)은 쇠를 녹여서 붓는 중간 과정의 업무를 하는 장인으로, 쇠로 기물을 만드는 주철장(鑄鐵匠)이나 주성장(鑄成匠)과는 구분된다.

세종 때 화살 등을 만들 때 주장은 야장(冶匠)·동장(銅匠)·전촉장(箭鏃匠)·연정장(鍊正匠) 등과 분업했다.

군기감(軍器監)의 야장은 주장, 갑장(甲匠)과 마찬가지로 각각 45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를 3번으로 나누어 매 1번에 15명씩 나누어 신역(身役)을 하도록 하는 분삼번출역(分三番出役)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처우는 보잘것없었고 신분적으로 천시되었으므로 그들은 장인이 되는 것을 기피하여 그 수가 항상 부족하였다. 1464년(세조 10)에 양성지가 군정개혁안을 제출하면서 군역제가 군포제로 바뀌었다.

[담당 직무]
주장은 쇠로 기물을 만드는 과정에 쇳물을 부어 화살촉과 갑옷을 만드는 신역을 졌는데, 소속 관청에서 여러 장색의 장인과 분업하였다.

첫째, 상의원과 공조에서 화살을 만들었다. 1434년(세종 16)에는 화살 등을 만들 때 주장 9명에서 23명을 늘려 야장 25명·동장 6명·전촉장 23명·연정장 21명 등과 분업하여 특수한 화살을 생산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 결과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별조전촉(別造箭鏃)을 만드는 장인을 업무에 따라 분업화하여 야장 3명, 조역 6명, 주장 6명, 연장(鍊匠) 6명으로 조직화되어 특수한 활촉을 생산하게 되었다.

둘째, 군기감에 소속된 주장은 갑옷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1460년(세조 6)에 군기감에 소속되어 있던 주장 45명은 노야장 45명·갑장 45명과 함께 3번으로 나누고 쇄아장(鎖兒匠) 30명·이갑장(移甲匠) 30명·환도장(環刀匠) 등과 함께 체아직 4명 가운데 부전사(副典事) 1명, 급사(給事) 1명, 부급사(副給事) 2명으로 하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변천]
조선초기에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병장기를 개선하고 생산량을 확대하고자 장인을 동원하였다. 주장은 세종대에는 별조전촉이라는 특수한 화살촉을 생산하기 위해 9명에서 23명으로 인원수를 늘렸으며, 야장·동장·연정장 등과 분업하여 생산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세조 때에는 군인들의 갑옷도 개량하였는데, 이때 주장은 45명이 군기감에 소속되어 노야장·갑장과 함께 3번으로 나누어 부역하게 하고, 성과에 따라 체아직으로 나갈 수 있게 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조선후기에 주장은 17∼18세기에는 왕실의 행사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도감에 오랫동안 징발되어 활동한 장인들을 통해 그 시기별 변화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17세기에 주장은 84곳의 도감에 차출되어 주장(鑄匠)이 6곳에만 차출된 것과 비교된다. 도감에서 주장의 숫자는 대개 6∼12명으로 많은 인원수가 여러 장색의 다양한 장인들과 분업적으로 작업하였다.

18세기 말부터는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사장(私匠)으로서 주장이 동원되었다. 이후 19세기에 주장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왕실의 족보를 인쇄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도감에 주장(鑄匠)이 1명씩 동원되었을 뿐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 장경희, 「조선후기 왕실제기 주성 유기장 연구」, 『한국공예논총』 11-2호, 2008.

■ [집필자] 장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