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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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장(雕刻匠)

서지사항
항목명조각장(雕刻匠)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관장(官匠), 은장(銀匠), 조이장(助伊匠), 조이장(雕貳匠)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금속 기물에 문양을 새기는 장인.

[개설]
조각장(雕刻匠)은 단조(鍛造)된 금속 기물의 표면에 정(釘)과 소도리로 장식 문양을 새기는 사람으로 조이장(雕貳匠)이라고도 한다. 조각장은 기물의 용처와 사용자에 따라 관장(官匠), 사장(私匠), 승장(僧匠)으로 나뉜다. 관장은 중앙과 지방관아에 예속되어 주로 금·은·동으로 제작된 왕실의 생활 기물, 제례·장례·가례 등 특별한 의례에 소용되는 기물과 장신구, 관수용품(官需用品), 사신행에 보내는 국신물 등에 문양을 시문하였다. 사장은 반상가와 서민들의 주기(酒器)·식기류 같은 기명(器皿)과 머리 수식구·패물 등의 장신구에 문양을 새겼고, 승장은 공양구나 장엄구의 표면에 불교 문양을 장식했다.

조각장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공조서에 2명이 배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 지방에 2명이 배치되어 관장 체계하에 활동했다. 근대기에는 종로의 은방도가(銀房都家)에서 몇몇 장인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0년에 전통 조각 기술을 계승, 보호하려는 문화재 보호 정책에 따라 중요무형문화재 제35호 조각장으로 지정되었다.

[담당 직무]
조각장의 직무는 왕실의 일상과 각종 의례, 관수용(官需用), 국신물로 제작되는 금속 기물의 표면에 조이질하여 장식 문양을 아로새기는 일이다. 문양을 음각하는 평각 기법에는 선각과 화각(花刻)이 있으며, 고각은 문양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문양주변을 음각하거나 표면에 문양을 오려 붙이는 기법이다. 투각은 문양을 뚫거나 반대로 문양 주위를 파내는 기법이고, 육각은 양각(陽刻) 기법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주요 도구는 정과 작은 망치인 소도리이며, 송진과 진흙에 들기름을 섞어 만든 감탕과 감탕받침인 송판, 도구를 가는 숫돌 등이다. 누깔정은 문양을 돋보이게끔 문양 주변에 작은 알 같은 어자문을 시문하는 데 썼으며 삼국시대에 유입되어 고려대 최전성기를 보였고 조선시대에도 성행한 기법이다. 효종의 딸 숙신공주(淑愼公主) 묘에서 출토한 은제석류문화장호나 정조의 후궁 홍씨가 사용한 은제화장호가 대표적인 예이다.

조각장이 아로새긴 문양은 각 시기별로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수복강녕·십장생·박쥐 등의 길상문양·산수문·연화문·보상화문·모란문·석류문·사군자문·당초문 등의 식물문, 용·봉황·거북·학·새 등의 동물문, 연지동자문(蓮池童子文)·화조문·운룡문 등이 같이 결합한 문양 등이다.

[변천]
삼국시대 고분 출토 유물은 관장이 제작했을 것이나 관장 체계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고려시대 들어 비로소 왕실용 장식품을 제작하는 공조서에 조각장이 2명 배치되었으며 지유전전(指諭殿前) 1명과 행수교위(行首校尉) 1명의 녹봉은 쌀 7석이었다. 조선시대 조각장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경공장(京工匠)으로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배치되었고 외공장으로 영안도관찰사에 1명, 충청도관찰사에 1명을 두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공조에 2명, 상의원에 4명이 배치되었으며 이들은 장적을 만들어 나이 60이 되어야 신역이 면제되었다. 정원과는 달리 실제로는 조각장의 인원이 많았던 것 같다. 즉 1434년에 병조와 군기감 제조가 아뢰기를 7, 8백여 명이었던 본감(本監)이 3백여 명에 불과해 각 분야별 인원을 증원하면서 조각장은 9명이니 1명을 더하자고 하였고[『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1460년에는 병조에서 혁파 대상의 절목을 건의할 때 조각장은 3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또한 조선후기 의궤에는 은장만큼 조각장도 많았으며, 소속 관청도 공조와 상의원뿐 아니라 훈련도감, 내수사, 금위영, 수어청 등 다양했다. 그만큼 조각일은 금속 기물에 필수적이며 공도 많이 드는 정교한 작업이라서 여러 명이 협업하였고, 일손이 부족하면 사장도 차출하였다. 조각장들은 보통 10∼20년 이상 활동했고 입사장보다 숫자도 훨씬 많았다.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조각장은 가장 먼저 『사직종묘문묘제기도감의궤(社稷宗廟文廟祭器都監儀軌)』에 등장하는 이축생(李丑生)을 비롯하여 1605년∼1610년까지 6번의 의례 때 작업했던 안효원(安孝元)·석천부(石天富)·이계남(李繼男)을 들 수 있다. 17세기 중반에는 책례와 국장 때 활약한 변득진(邊得進)을 비롯해 김의립(金義立)·김천룡(金天龍)·민승업(閔承業)·장차산(張次山)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장이었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반에 활동한 조각장으로는 김명원(金明元)·이만근(李萬根)·김석로(金石老)·박세근(朴世根)·윤유천(尹有天)·오이건(吳二建), 그리고 사장인 정돌시(鄭乭屎)를 들 수 있다. 18세기 중엽에는 편유창(片有昌)·김세완(金世完)·김오현(金五賢)·박태문(朴泰文)·이진무(李震茂)·박동창(朴東昌)·서상휘(徐尙輝)·정순흥(鄭順興)·이여송(李如松) 등이 여러 해 동안 각종 의례 때 활약했다. 특히 박동창은 20년 이상 활동했고 25년간 활동한 박태문은 사(私) 또는 나례청(儺禮廳)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국가에 제례가 있을 때나 영조의 국장 때처럼 많은 장인이 여러 기물을 만들어야 했을 때 차출될 만큼 뛰어난 장인이었던 것 같다. 18세기 말에는 박문희(朴文喜), 19세기 전반에는 조성득(趙性得)·조수길(趙守吉)·김응록(金應祿)·전치운(田致雲)이 대표적인 조각장이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김종태, 『韓國手工藝美術』, 예경산업사, 1990.
■ 삼성문화재단 편, 『大高麗國寶展』, 삼성문화재단, 1995.
■ 예용해, 『人間文化財』, 어문각, 1963.

■ [집필자] 안귀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