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군사용이나 의례용 등에 사용하기 위하여 직선 또는 곡선의 칼날을 가진, 허리에 차는 긴 칼을 만드는 장인.
[개설]
조선시대에 검장(劍匠)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도자장(刀子匠)이 주로 단검을 만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경공장(京工匠)으로 군기감(軍器監), 상의원(尙衣院)에 있었으며 외공장(外工匠)으로서 환도장(環刀匠)은 없었으므로 야장(冶匠) 등 다른 장역(匠役)의 장인이 만들었다. 조선시대 환도는 대표적인 무기로 수요가 많아서 환도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사장(私匠)도 있었다.
[담당 직무]
상의원 소속의 환도장은 주로 왕실이나 의전용 그리고 왕의 하사품, 사신에 대한 선물용 등의 환도를 제작하였다. 무기로 사용하는 환도는 조선초기에 군기감 소속의 장인이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도는 지방의 야장이 제작하였는데, 그 수량이 매년 지방 308곳에서 9,705개를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지방의 환도장 기술이 서울보다 뒤졌기 때문에 만든 환도를 다시 제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앙에서는 환도를 대량으로 제작할 경우에는 지방 장인에게 역사를 시켰는데 솜씨 좋은 환도장을 구하기 어려웠다[『광해군일기』 10년 10월 8일].
조선후기에 군영에 속해 있는 환도장은 근무 기간 동안에 매월 봉급을 받았다. 또한 중앙 부서에서 환도를 대량으로 제작하기 위해 지방 환도장을 불러 서울에서 작업을 시킬 경우에는 임금으로 매달 포(布) 1필을 주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 환도를 제작했던 장인은 군기감에 소속된 장도장(長刀匠)이었다. 이들은 군기감에서 일한 노역의 대가로 무산계(武散階)를 받거나 일정한 토지를 분급받기도 하였다. 고려후기 원나라에 수출할 목적으로 환도를 대량으로 제작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환도장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환도장은 군기감, 상의원에 소속되었는데, 1434년(세종 16)에 군기감 소속 장인이 증원되었을 때 환도장은 2명에서 6명으로 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또한 1460년(세조 6)에 이르면 군기감의 후신인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된 환도장이 세종 때보다 증원된 33명이 되었으며 한 번에 11명씩 근무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이 편찬된 1485년에 이르면 군기시에는 환도장이 없어졌으며, 상의원에만 12명이 남아있었다. 이 환도장들은 영조 때까지 있었으며 이들이 제작한 환도는 내궁방(內弓房)에서 관리하였다. 그러나 『속대전(續大典)』이 편찬된 시기인 영조 때에는 상의원에서 환도 제작을 담당하였던 잡직인 공제(工製), 공조(工造), 공작(工作)이 폐지되었는데 이때 상의원의 환도장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환도장은 없어졌지만 인조 때 군기시에서 환도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기시의 장인들도 필요할 경우 환도를 제작하였으며, 훈련도감 등 각종 군영에 소속된 장인들도 환도를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