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시대에 통개장(筒箇匠), 시복장(矢服匠), 전실장(箭室匠), 전복장(箭服匠) 등도 통개장(筒介匠)을 가리키는 용어로, 중앙에는 공조(工曹)에 관공장(官工匠)이, 지방에는 사공장(私工匠)이 있었다.
[담당 직무]
가죽으로 된 화살집인 통개를 만들었는데 같이 몸에 차는 궁대(弓袋)도 만들었을 것이다. 경공장으로 공조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외공장(外工匠)은 별도로 없었다. 그러나 각 지방에서 방물로 통개를 바쳐야 하므로 지방에도 통개장이 있었다. 통개는 사슴과 돼지가죽 등으로 만드는데, 제작 기법과 재료가 전통(箭筒)과는 달라 통개장이 전통을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통개와 시통(矢筒)이 별개였음은 1425년(세종 7)에 세종이 매를 잘 부리는 문효종(文孝宗)에게 시복, 전통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세종실록』 7년 3월 27일]. 통개는 모든 군사가 갖추어야 할 물건이므로 그 수효가 많아 통개장은 이를 제작하여 생계를 영위할 수 있었다.
[변천]
기록상으로 통개장은 1460년(세조 6)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때 공조에 시복장이 12명 있었는데, 3번으로 나누어서 한 번에 4명씩 근무하였으며, 다른 11개의 장인 직종과 합하여 체아직으로 부급사(副給事)가 있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이 인원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시점인 1485년에 크게 줄어 공조에 2명만이 배정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군기시(軍器寺)에서 통개를 만들었는데, 통개장이 군기시에 소속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