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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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矢人)

서지사항
항목명시인(矢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공장(工匠)
동의어시장(矢匠), 전장(箭匠)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화살을 만드는 장인.

[개설]
전장(箭匠), 시장(矢匠)으로도 불렸으나 궁인(弓人)과 마찬가지로 다른 장인과는 달리 주로 시인(矢人)이라고 하였다. 경공장(京工匠)인 시인은 왕실용 화살을 제작하는 상의원(尙衣院) 내궁방(內宮房)과 무기를 제작하는 군기감(軍器監)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지방에는 각 도에 소속되어 공납용 화살 등 각종 화살을 만들었다.

[담당 직무]
시인은 화살대를 구하거나 각각의 재료를 결합하여 화살을 완성하는 일을 하였다. 이들은 조선전기에 상의원과 군기시(軍器寺)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 화살을 만드는 시방(矢房)은 내시방(內矢房)과 외시방(外矢房)이 있었으며 그 밖에 여러 곳에 시방이 있었다. 주로 왕실용의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 내궁방에 소속된 시인은 다른 장인보다 우대되었다. 이에 다른 기관에서 활동하는 시인이 왕의 권세를 이용하여 내궁방으로 투속(投屬)하려는 일까지 생기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8일].

조선초기에 이들은 중국 사신의 청지기나 방수(房守)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 활과 화살을 선호하여 장인들과 은밀히 거래할 수 있다는 지적으로 인해 1480년(성종 11)부터 시인은 궁인과 함께 이 역(役)에서 제외되었다[『성종실록』 11년 4월 20일]. 중국 사신들은 우리나라의 활과 화살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그들이 오면 궁시장은 대기를 하였으며, 중종 때에는 중국 사신이 태평관 안에 활과 화살을 만드는 공작청(工作廳)을 만들어주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3년 1월 5일]. 시인은 근무하는 대가로 체아직을 받았으며 보정(保丁)을 지급받았다.

1626년(인조 4)에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병전」 ‘급보(給保)’조의 규정이 재해석되어 시인은 보정이 1명으로 축소되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장인들은 번의 순서에 따라 감영 안에서 근무하였다.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의하면, 관청의 장인들은 매월 2곡 5말을 받으며 매년 30곡을 받았는데, 우수한 시인은 특별히 1등을 더하여 9품 관원이 받는 녹봉과 같도록 대우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매달 녹봉을 받았는데, 1625년(인조 3)에 내궁방의 시인과 궁인이 5월달 임금으로 별영(別營)에서 지급받은 쌀이 좋지 않아서 급료를 받지 않고 행패를 부려 처벌받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군기감에 전장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초기 세종 때 군기감 소속의 장인 역할이 분업화되어 화살대 제작은 목공(木工), 화살 깃을 붙이는 일은 각장(刻匠), 화살촉을 만드는 일은 야장(冶匠)이 하였으며 별도의 시인이 없었다. 그러나 1460년(세조 6)에는 군기감에 시인의 정원이 60명으로 되었으며 한 번에 20명씩 근무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체아직으로는 궁인과 함께 부관사(副管事) 1명, 전사(典事) 1명, 부전사(副典事) 1명, 급사(給事) 2명의 직을 받았다. 또한 상의원의 내궁방에는 시인이 1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인 10명과 함께 체아직으로 부사직(副司直) 1명, 사정(司正) 1명, 부사정(副司正) 3명, 사용(司勇) 5명이 있었다. 또한 상의원에는 시인 30명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한번에 10명씩 근무하였으며 궁인 15명과 아울러 체아직으로는 부전사 1명, 부급사(副給事) 1명의 직이 주어졌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그런데 때로는 품계가 높은 관원이 궁인이나 시인의 체아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4년 8월 4일]. 또한 이 시기에 시인과 궁인의 체아직 자리 가운데 부사정 2명, 부사맹(副司猛) 2명, 부사용(副司勇) 7명의 자리가 폐지되어 시인과 궁인에 대한 대우가 일부 축소되었다[『성종실록』 8년 1월 29일].

『경국대전』이 완성된 1485년에는 경공장으로 상의원에 21명, 군기시에 150명이 배속되어서 이전 시기보다 인원이 증대되었다. 외공장(外工匠)으로는 경상도에 72명의 시인을 포함하여 모두 377명이 배정되었다. 조선후기에 시인은 군영의 무기 제작에 동원되었는데, 훈련도감에는 시인 등 6개 장색이 있었고 기타 나머지 필요한 장인은 사장인(私匠人)을 동원하였다. 훈련도감에서는 1635년(인조 13)에 소속된 아동군(兒童軍) 가운데 시인 4명을 육성하여 도감에 필요한 장인을 확보하였다. 내궁방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는데 이때 소속된 시인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일환, 『연기궁인 서천 침선장』, 도서출판 선인, 2011.
■ 강만길, 「조선전기의 관장제와 사장」,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김일환, 「조선 초기 군기감의 무기제조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김일환, 「조선 초기 감련관제하의 군기제조 연구」, 『한국사학보』 10 , 고려대학교, 2001.
■ 이혜옥, 「조선전기 수공업체제의 정비」, 『역사와 현실』 33, 1999.

■ [집필자] 김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