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마조장(磨造匠)은 무기인 화포나 화살의 제작에 참여하거나 생활용품인 분통(粉桶), 향합, 목제 절구, 맷돌, 돌방아, 바둑판 등 다양한 물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나무를 갈아서 물건을 만드는 마조장을 목공(木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외공장(外工匠)인 마조장은 없었으나 사장(私匠)인 마조장은 자신이 만든 물품을 팔아서 생활을 영위하였다.
[담당 직무]
조선초기에 군기감(軍器監) 소속의 마조장은 화포 제작 및 화살의 제작 과정에서 화살촉을 끼울 구멍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다른 부서에 속한 마조장은 갈아서 만드는 물품을 제작하였다. 마조장은 갈거나 구멍을 내는 직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국가에 필요한 일에 임시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공역에 동원될 때 줄칼, 줄우피, 속새, 숫돌, 줄 등 주로 물건을 가는데 쓰는 도구를 제공받았다.
정조 때에는 마조장 10명이 도자기 제작에도 동원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각각 무명 1필을 상으로 받았다. 또한 왕이 행차할 때 마조장이 따라가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때 지방의 마조장은 주로 산골짜기에 거주하고 있었다.
숙종 때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마조장에게는 오가작통을 적용할 수 없어서 그들이 살고 있는 가까운 곳을 주통(主統)으로 삼아서 관리하고자 하였다.
국역(國役)을 담당하지 않는 마조장의 경우 장세를 납부하였는데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마조장은 봄에는 호조에 8푼 5리를 납부하였으며 가을에는 1인당 쌀 14말 3되에서 1섬 5말까지 납부하였다. 그들이 납부하는 액수는 수철장(水鐵匠), 사기장(沙器匠), 옹기장(甕器匠)보다는 적은 금액이었는데, 이들보다는 수입이 적었기 때문이다. 간혹 지방에서 마조장이 없어질 경우 그들에게 받아야 할 세금을 일반 양인에게 납부하도록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묵재일기(黙齋日記)』에 의하면 성주(星州)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이문건(李文楗)에게 마조장은 촛대, 향합, 목제 항아리, 분통, 바둑통, 나무 절구, 목함, 명기 등 다양한 물품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았다. 이들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직접 벌목을 하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마장(磨匠)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왕실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 중상서(中尙署)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인 1434년(세종 16)에 군기감에 소속된 마조장이 5명 증원되어 총 10명이 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그 후 세조 때인 1460년(세조 6)에는 군기시(軍器寺) 소속 마조장이 15명으로 늘었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된 1485년에는 군기시의 마조장이 12명으로 축소되었다. 그 밖에 상의원(尙衣院)에 4명, 선공감(繕工監)에 8명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경공장(京工匠)으로 총 24명이 활동하였다. 조선후기인 영조 때 마조장은 지방의 재정 확충을 위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지방관아에서 원래 역(役)에 없었던 마조장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돈을 받아 관고(官庫)에 채워놓고 이자 놀이를 하였다. 그 결과 군역을 담당할 양인의 수가 줄어들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마조장은 국역(國役)에 필요할 때마다 동원되었는데, 정조 때 문희묘(文禧廟) 건립에 동원된 마조장은 매일 2전 8푼을 받았으며 공사가 끝난 후에는 상을 받았다. 국역에 응한 마조장은 장보(匠保)가 있어 이들의 도움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1905년에 국장 때에도 마조장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임금으로 1인당 6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