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주로 양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가 궁인(弓人)이 되었으며, 궁장(弓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다른 장인과는 차별하는 의미에서 주로 궁인이라고 불렸다. 또한 때로 문헌에서 궁인이라는 표현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도 하였다. 궁인은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이 모두 존재하였으며 다른 장인보다 우대받았다.
[담당 직무]
활을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활에 필요한 활시위는 별도로 다른 장인이 만들었다. 이들은 활에 필요한 나무를 얻는 일부터 소의 뿔을 붙여서 활을 완성하는 일까지 모든 공정을 처리하였다. 활을 만드는 내궁방(內弓房)은 도총부(都摠府) 북쪽에 있었으며, 외궁방은 마전교에 있었다. 내궁방에 소속된 궁인은 상당한 특권을 누렸는데, 이들이 활에 쓸 나무를 구하기 위해 지방으로 갈 때는 말이 제공되며 수령이 접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중국 사신단의 청지기나 방수(房守) 역할을 하였는데,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 활을 구하기 위해 궁인과 거래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1480년(성종 11)에 이 역에서 제외되었다[『성종실록』 11년 4월 20일].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이 방문할 때 우리나라의 활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 중국 사신이 오면 궁인이 대기하여야 하였으며, 심지어는 중국 사신이 태평관 안에 활을 만드는 공작청(工作廳)을 만들어주도록 요구하기까지도 하였다[『중종실록』 3년 1월 5일]. 궁인은 활의 재료인 궁각(弓角)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에 끼여 동행하기도 하였다. 궁인은 체아직을 받았으며 보정(保丁)도 지급되었다.
지방관청에 소속된 장인은 순번에 따라 감영에서 근무하였는데, 함경도감영의 궁인에게는 고공(雇工)과 솔정(率丁)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1626년(인조 4)에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급보조(給保條)’의 규정을 재해석하여 궁인은 보정을 2명에서 1명으로 축소되어 지급받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의하면, 경공장은 매년 30곡을 받는데, 우수한 궁인의 경우에는 특별히 1등을 더하여 9품의 관원이 받는 녹봉과 같도록 대우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매달 녹봉을 받았는데, 1625년(인조 3)에 내궁방의 궁인이 5월 달의 임금을 풍저창(豐儲倉)이 아닌 별영(別營)에서 받았는데 그 쌀이 좋지 않다고 행패를 부려 처벌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도 궁장은 여전히 우대받았다. 가령 활을 잘 쏘는 궁인에게는 말이 하사되기도 하였으며, 내궁방의 궁인은 무과 초시(初試)를 면제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궁방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면서 활 1,000개 이상을 제작하면 직첩을 가자(加資)해주었는데, 이런 규정은 1794년(정조 18)에 정착되었다. 원래 이 규정은 영조 때부터 실시되었는데, 처음에는 내궁방의 장인만이 혜택을 받았다. 그러자 군기시(軍器寺)의 궁인 가운데 내궁방 소속이라고 사칭하였다가 처벌받는 자가 생기기도 하였다. 결국 순조 때에는 내궁방뿐만 아닌 다른 기관에 소속된 궁인도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지방에서 공납으로 바치는 활의 품질을 감독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뇌물을 받기도 하는 등 권력을 행사하였다. 반면에 궁인들은 자신이 제작한 활에 대한 책임이 따랐다. 내궁인이 만든 활은 제작자의 이름을 명기하여 그 활이 부러지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무기를 제작하는 군기감(軍器監)과 내궁전고(內弓箭庫)에 각궁장(角弓匠)이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434년(세종 16)에 군기감 소속 장인의 수가 늘었는데, 이때 궁인은 정원 27명에 13명을 증원하여 총 40명이 되었다[『세종실록』 16년 6월 11일]. 1438년(세종 20)에 세종은 대궐 안에 내궁방을 설치하여 왕실에 필요한 궁시를 만들게 하였는데, 여기에도 궁인이 소속되어 일하였을 것을 보인다. 세조 때에는 궁인에 대한 체아직을 조정하였는데, 상의원(尙衣院)의 내궁방 소속 궁인 10명은 시인 10명과 함께 부사직(副司直) 1명, 사정(司正) 1명, 부사정(副司正) 3명, 사용(司勇) 5명의 체아직을 받았다. 이 밖에 상의원에는 궁인 15명이 있었는데, 한번에 5명씩 근무하였으며 시인(矢人) 30명과 아울러 체아직으로는 부전사(副典事) 1명, 부급사(副給事) 1명의 직이 주어졌다.
궁시인은 다른 장인의 체아직보다 자리가 많았으며 그 직급도 높았다. 이 밖에 군기감에 속한 궁인 90명은 시인 60명과 합쳐 부관사(副管事) 1명, 전사(典事) 1명, 부전사 1명, 급사(給事) 2명을 받았으며, 한번에 30명씩 근무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그러나 때로는 품계가 높은 관원이 궁인이나 시인이 받는 체아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4년 8월 4일]. 또한 이 시기에 궁인과 시인의 체아직 가운데 부사정 2명, 부사맹(副司猛) 2명, 부사용(副司勇) 7명의 자리가 폐지되어 궁인과 시인에 대한 대우가 축소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8년 1월 29일]. 『경국대전』이 완성된 시기인 1485년에 이르면, 경공장으로 상의원에 18명, 군기시에 90명 등 모두 108명의 궁인이 배속되었다. 외공장으로는 경상도에 59명을 포함하여 모두 284명의 궁인이 각 지역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군영에 궁장이 있었는데, 훈련도감의 경우 궁인 등 6개의 장역(匠役)이 있었으며 기타 필요한 장인은 사장(私匠)을 불러 역사시켰다. 1635년(인조 13)에는 훈련도감에서는 소속된 아동군(兒童軍) 가운데 궁인 11명을 육성하여 자체적으로 필요한 장인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궁장의 부족으로 활을 대량으로 만들 때에는 지방의 궁인이 서울로 와서 작업을 하였는데, 그 기간이 장기화될 때도 있었다. 궁인 가운데에는 몇 년 동안 서울에 올라와서 작업을 하다가 사망하는 자도 있었는데, 정부에서는 그의 시체를 운구할 말을 지급하였다. 왕실용 활과 화살을 제작하던 내궁방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는데, 이때 소속 궁인도 없어졌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