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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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력(大統曆)

서지사항
항목명대통력(大統曆)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역법(曆法), 역서(曆書)
관련어대명력(大明曆), 수시력(授時曆)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384년에 명나라 누각박사(漏刻博士) 원통(元統)이 만든 역법 혹은 대통력을 바탕으로 만든 역서.

[개설]
대통력은 중국 명나라 역법으로 한국에서는 고려후기부터 1653년 시헌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사용한 역법이다. 대통력은 이름만 다를 뿐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거의 동일한 역법으로, 수시력의 천문상수(天文象數) 중 일부와 역원(曆元)을 1281년인 지원(至元) 18년에서 1384년인 홍무(洪武) 17년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시헌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조선은 역서명을 대통력으로 사용하였지만, 천문 계산에서 수시력과 대통력을 종합한 『칠정산(七政算)』을 사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수시력은 지원 18년 신사년(辛巳年)을 역원으로 하였는데 대통력은 홍무 17년 갑자년(甲子年)을 역원으로 하였다. 수시력의 추보법(推步法)에는 소장(消長)하는 법이 있었는데 대통력에서는 이것을 없앴으며, 기삭(氣朔)과 발렴(發斂)을 수시력에서는 본래 2장으로 나누었는데 대통력에서는 하나로 합하였다. 그리고 정삭(正朔)과 경삭(經朔)을 수시력에서는 두 곳으로 분리하였는데, 대통력에서는 경삭 뒤에 곧 정삭을 구하였으며, 이 밖에는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세종대 만든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은 대통력이 반포된 이후에 만든 것이었지만 수시력의 역원인 지원 신사년(辛巳年)을 역원으로 하여 계산하였다.

조선초기의 천문관서인 서운관(書雲觀)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종합한 『칠정산』을 사용하여 그 해의 역을 계산하고 역서를 만들었다. 대통력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1580년 경진년 『대통력』이다. 경진년 『대통력』은 활자본으로 총 1책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역서 상태가 아주 좋은 편이다. 갑오년 『대통력』이 목판으로 간행된 것이 비하면, 경진년 『대통력』은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대통력 가운데서도 자료적 가치가 대단하다. 대통력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경진년 『대통력』 이전에는 1594년 갑오년 『대통력』이 가장 오래된 대통력으로 알려졌었다.

대통력의 전체 체제는 역서의 순서상으로 보면, 첫 면에 권두서명과 12달의 대소가 각각 적혀 있으며, 그 하단에 24기의 입기시각(入氣時刻)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서 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가 있다. 이어서 날짜와 일진을 중심으로 그 윗칸에는 달의 삭망이 적혀 있고 날짜의 아래 칸에는 시헌력과 마찬가지로 일진의 의(宜), 불의(不宜)가 각각 기록되어 있다.

본문인 월력면(月曆面)에서 대통력은 달의 위상과 관련한 정보가 날짜에 머무르고 있다. 대통력은 음력의 달의 주기를 기초로 삭(朔), 상현(上弦), 망(望), 하현(下弦)과 같은 달의 변화가 일어나는 날짜는 기록해 놓고 있지만, 정확한 시각과 분초까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전통시대 중국과 한국은 간지를 년(年)과 월(月) 및 시(時)에다 활용하였다. 연의 간지를 이른바 세차(歲次)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역서의 권두서명에 세차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60간지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고대 중국의 천문학자들은 행성들이 천구상의 같은 위치에 모이는 주기에 관하여 신경을 써왔다. 그중 목성과 토성이 같은 황경 상에 거듭 돌아오는 주기가 60년에 극히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목성의 대항성 주기 11.86년에 대하여 토성은 29.46년이기 때문이다. 간지로 역년(曆年)을 나타내는 방법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해당 역서의 해를 기준으로 지나간 60년간의 간지를 기록한 것은 대통력의 특징이다. 다음으로 대통력 역서의 맨 마지막 장에는 취가주당도(娶嫁周堂圖)도가 그려져 있으며 아래에는 역서 편찬에 참여한 관상감 관원이 소개되어 있다.

역서의 연신(年神)을 살펴보면, 소위 세간합(歲干合)은 세덕합(歲德合)이라고도 부르며, 천지음양을 배합하는 신이라고 하는데, 이 방향으로는 집을 짓거나 수리하거나 결혼하거나 먼 여행을 해도 좋다는 미신이다. 역법 면에서 살펴보면 역서의 체제와는 무관하지만, 대통력은 평기법(平氣法)을 사용하였다. 평기법은 24절기를 15.22일로 균등하게 나눈 계산법이다. 조선후기 시헌력은 평기법 대신 정기법(定氣法)을 사용하였는데, 정기법은 황도상의 태양의 불균등한 운행 속에 맞추어 14.72일에서 15.73일로 나누어 1달에 1개 혹은 3개의 절기가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역법 계산에 있어 대통력과 시헌력은 대략 하루간의 차이가 있지만, 역서 체제에 있어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큰 변화는 없다.

대통력의 경우도 첫 면에 달의 대소 및 24절기 입기 시각이 적혀 있는 등 일반적인 전통 역서 체제를 하고 있으나, 주목할 점은 권두서명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력은 권두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방위(方位)와 관련한 소위 세덕합이라는 것이 위치해 있다. 세덕합은 천지음양을 배합하는 신(神)이라고 하는데, 이 방향으로는 집을 짓거나 수리하거나 결혼하거나 먼 여행을 해도 좋다는 미신이다. 예를 들어 길한 방위는 갑년(甲年)에는 기(己)에 있고 을년(乙年)에는 경(庚), 병년(丙年)에는 신(辛), 정년(丁年)에는 임(壬), 무년(戊年)에는 계(癸), 기년(己年)에는 다시 기(己)에 있다고 한다. 1594년 대통력을 보면, 큰 글씨로 태세재갑오(太歲在甲午) 세덕재갑합재기(歲德在甲合在己)라 적혀져 있는데 이는 1년 중 가장 길한 방향을 알려준 것이다.

대통력에는 권두서명이 없지만,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의 대통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모든 대통력에 권두서명이 없는 것은 아니고 1600년을 기준으로 현재의 시헌서(時憲書) 체제로 변화한 듯하다. 현재 1600년 대통력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1598년 대통력까지는 권두서명이 없으나, 1604년 대통력에는 중국 연호가 들어간 권두서명이 첫 면 첫줄에 인쇄되어 있다. 이 시기에 갑자기 역서에 중국 연호가 들어간 배경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군 파병에 대한 조선의 고마움을 역서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이 시기 조선에서 역서가 발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명나라가 불쾌함을 표현하자 이를 피해갈 목적으로 권두서명에 명의 연호를 넣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후 중국 연호가 들어간 권두서명은 1894년 역서까지 약 300년간 이어졌다.

[변천]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원의 역법이었던 수시력이 대통력으로 개력되었다. 명나라 건국 초기에 태사원(太史院) 사(使) 유기(劉基)가 무신대통력(戊申大統曆)을 태조(太祖)에게 올리고, 1370년(홍무 3) 대통민력(大統民曆)이 만들어졌지만 이는 모두 원나라 때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수시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384년(홍무 17) 누각박사(漏刻博士) 원통(元統)이 수시력을 약간 수정하고, 그 해를 역(曆)의 기원으로 하여 대통력, 즉 『대통력법통궤(大統曆法通軌)』를 만들었다. 이것은 1년을 365.2425일로 하는 역법은 수시력과 동일했고, 100년마다 1만분의 1씩을 줄이는 소장법(消長法)을 수시력에서 뺀 것이 수시력과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대통력은 명나라 말기까지 260여 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한국에는 고려후기 에 전해져서, 1654년(효종 5)부터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할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대통력(大統曆)』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曆法의 原理分析』,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 [집필자] 정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