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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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丁卯胡亂)

서지사항
항목명정묘호란(丁卯胡亂)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병자호란(丙子胡亂), 후금(後金), 홍타이지[皇太極]
분야정치
유형사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627년(인조 5) 1월에 후금이 36,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한 후 3월 초에 강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두 달 가까이 벌어진 전쟁.

[개설]
조선에 대해 강경노선을 견지하던 홍타이지[皇太極]가 1626년(인조 4) 가을에 누르하치[奴兒哈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조선을 침입했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그러나 당시 후금은 요서에서 명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조선과의 전쟁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쟁 초기부터 조선에 강화협상을 타진했다. 조정을 강화도로 옮긴 조선도 협상에 임해, 전쟁 발발 약 50일 만에 강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누르하치가 1583년에 건주여진(建州女眞), 곧 남만주에 살던 여진족을 통합하고 1616년(광해군 8)에 후금을 건국하면서 동북아시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후금의 흥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1619년(광해군 11)에 감행한 조·명연합군의 원정은 참패로 끝났다. 그 반격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후금이 요동을 장악함으로 인해 명과 조선의 육상교통로가 끊기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은 날로 거세졌다. 이에 대해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중외교를 펼치며 후금과의 평화적 공존을 모색함으로써 전쟁을 피했다. 그러나 1623년(인조 1)에 정변을 통해 집권한 인조는 친명(親明)노선을 분명히 했고, 후금에서도 1626년(인조 4)에 즉위한 홍타이지가 조선에 대해 강경노선을 폄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이 1627년(인조 5) 1월에 36,000명의 기병으로 조선에 침입함으로써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발단]
인조 정권이 비록 후금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광해군 때와는 달리 친명노선을 분명히 함으로써 후금과의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유지되었다. 또한 평안도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존재 및 그에 대해 우호적인 조선의 태도로 인해 긴장은 고조되었다. 그러나 누르하치 집권기에는 명과 조선 두 나라를 동시에 적으로 만들면 자국에 불리하다는 판단하에 온건정책을 견지하여 조선에 대해 적대행위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을 먼저 굴복시켜 후방을 든든히 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편 홍타이지가 1626년(인조 4) 가을에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후금이 조선을 곧 침공하리라는 첩보가 속속 한양에 전달되었다. 또한 후금에 대한 명의 무역제재조치 및 거듭된 흉년으로 인한 후금 내부의 물자 부족 현상도 후금의 조선 침공에->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경과]
후금의 패륵(貝勒) 아민(阿敏)이 이끄는 36,000여 기병이 1627년(인조 5) 1월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4일에 평안도 의주와 창성에서, 15일에는 용천 부근의 능한산성(凌漢山城)에서 조선군은 모두 적에게 패퇴했고, 후금군은 선천·곽산·정주를 지나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사이에 모문룡도 가도를 버리고 인근의 신미도(身彌島)로 옮겨가 웅거했다. 20일에는 제1방어선인 안주(安州)마저 후금군에게 함몰되자, 제2·제3방어선인 평양과 황주를 지키던 조선군은 아예 항전을 포기하고 황해도 봉산으로 퇴각했다.

위기에 봉착한 조선 조정은 임진강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는 한편, 국왕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근왕병을 모집했다. 주인이 떠난 한양 도성은 이미 무법천지로 변했으며, 아무런 방어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남았다.

그러나 애초 침공 목표가 조선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던 만큼, 후금은 조선과의 협상을 원했고 이에 조선이 응함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개전 초기부터 이미 강화협상이 진행되었다. 협상 초기에 조선은 국가의 위신을 최소한으로 손상하는 선에서 강화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후금이 먼저 철수를 해야 강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나, 후금의 국서를 들고 강화도 행궁(行宮)을 방문한 후금 사신을 인조가 직접 접견하지 않고 국서를 대신이 받게 한 일 등은 모두 이런 입장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초기 협상은 별다른 진척이 없었고, 후금군은 황해도 황주를 지나 평산까지 남하해 조선을 더욱 압박했다.

이후에 재개된 협상에서 주요 사안은 조선이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문제, 두 나라가 맹약을 체결할 때[和盟儀式] 조선 국왕이 직접 와서 희생 짐승을 잡아[刑牲] 맹약을 쓰고, 이후 사신이 해마다 후금에 대해 예물을 바치는 예폐(禮幣) 문제 등이었다. 긴박한 협상과 조정을 거쳐 3월 3일에 화약이 이루어졌는데, 위의 세 가지 사안은 조선이 명의 연호를 더 이상 쓰지 않고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국왕 인조가 맹약 현장에 직접 나서기는 하되, 짐승을 잡아 약조를 체결하는 의식은 대신이 행하고, 예폐의 물량을 조절하는 것으로 결말을 보았다. 이 밖에도 화약의 성립 직후 후금군이 모두 철수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화약 이후에도 후금은 모문룡 문제와 평안도 일대에서 항거하는 조선 의병을 구실로 삼아 4,000명 정도의 병력을 의주 일대에 4개월 이상 더 주둔시켰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후금에 정식으로 항의했고, 이후 양국 사이에 국서가 빈번히 오가다가 9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후금군은 완전히 철수했다. 따라서 화약의 체결을 전쟁의 종료 시점으로 본다면 정묘호란은 약 50일 동안 진행된 셈이며, 후금군의 완전 철수를 종전 시점으로 본다면 전쟁은 약 6개월을 끈 셈이다.

정묘화약(丁卯和約)은 조선으로서는 최소한의 위신을 지켰으며, 후금으로서는 조선을 완전히 제압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또한 요서 일대에서 벌어진 명과 후금의 전쟁은 날로 치열해져 갔다. 따라서 화약 후에도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갖가지 사안으로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급기야 9년 뒤인 1636년(인조 15)에 청이 조선을 재차 침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
■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 김종원,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혜안, 1999.
■ 류재성, 『병자호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집필자] 계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