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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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지은(再造之恩)

서지사항
항목명재조지은(再造之恩)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재조지망(再造之望), 재조번방(再造藩邦), 신종(神宗), 춘추지의(春秋之義), 의리(義理), 만동묘(萬東廟), 대보단(大報壇)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때 망해가던 조선을 명이 군대를 보내 다시 세워준 은혜라는 뜻으로 왜란 이후에 널리 쓰인 용어.

[개설]
임진왜란 초기에 극도로 불리한 형세에 처한 조선 조정은 명의 참전을 끌어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1593년 정월에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한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고 전세가 호전되면서, 조선에서는 ‘명이 조선을 다시 살려주었다’는 뜻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명의 북경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조선에 와 있는 명나라 장수를 상대로 사용했으나, 점차 명과 조선이 매우 돈독한 특별한 관계임을 강조해 드러내기 위한 관용어로 양반지배층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17세기 전반의 명·청 교체기를 맞아 쇠퇴하는 명과 흥기하는 청(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융통성 있는 외교노선을 펴지 못하고 친명배청(親明排淸) 노선을 고수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이전부터 민심을 잃고 있던 조정은 전쟁 발발 직후에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면서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중신들의 만류에도 요동으로 망명하려는 생각을 고집한 선조는 백성뿐 아니라 조정 신료들로부터도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심각할 정도로 상실했다. 선조와 조정이 이런 곤경을 벗어날 돌파구는 오로지 명군(明軍)의 참전이었고, 실제로 선조와 일부 조정 중신들은 명의 참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발발 두 달 만에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에게 ‘조그만 나라 조선을 다시 세워줄 희망’이라는 뜻으로 ‘소방재조지망(小邦再造之望)’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쓴 이래, 이여송이 이끈 명군이 평양성을 수복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이후로는 ‘재조지은’이라는 표현이 등장해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용어의 변천은 처음에 재조를 바라는 소망이 평양성 수복을 계기로 망(望)에서 은(恩)으로 현실화된 결과였다.

그런데 전쟁 중에 등장한 재조지은이라는 표현은 명을 상대로 한 대외적 용도로만 쓰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취지에서 대내용으로 널리 쓰이고 강조되었다. 이를테면 실추된 국왕과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선조는 전쟁 극복의 공로를 조선의 관군이나 의병보다는 거의 전적으로 명군에게 돌리는 자세를 취하면서, 자신의 의주 파천을 백성을 버린 단순 도피가 아니라 명군을 불러들이기 위한 전략적인 결단으로 포장해 선전했던 것이다. 이는 전란 극복의 최대 요인을 명군의 참전에 둘 경우에, 그 명군을 불러들인 자신과 측근 신료들에게 가장 큰 공이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전쟁 후의 논공행상과 공신 책봉 과정에서 무공이 혁혁한 장수들보다는 파천 당시 자신을 수행한 자들을 상대로 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거의 절대적인 무게를 둔 점은 그 좋은 예이다. 심지어 숱한 논란을 야기하면서까지 자신을 호종한 내시와 하인들까지 공신에 올린 점은 당시 선조가 얼마나 명군의 역할을 확대해 해석하려고 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래도 왜란 이후 재조지은은 조선의 양반사대부 사이에서 조선과 명의 돈독하고도 특별한 관계, 곧 군부(君父)·신자(臣子) 관계를 강조해 드러내는 관용적 표현으로 널리 쓰이면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17세기 전반의 명·청 교체기를 맞아 쇠퇴하는 명과 흥기하는 청(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는 외교노선을 채택하지 못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우선해 친명배청 노선을 고수하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후금의 공세에 이렇다 할 대처를 못하던 명이 조선에 군사 요청을 하면서 재조지은을 갚으라는 식으로 논리를 세웠을 때 그것을 거부하기 힘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재조지은 담론은 왜란 이후의 정국을 타개하고 왕조를 안정시키는 데에는 일정 부분 기여했으나, 명·청 교체기에 처해서는 조선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스스로 좁히는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변천]
1637년 인조의 삼전도 항복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17세기 후반에 북벌(北伐) 논의가 일세를 풍미했다. 그런데 그 이론적 바탕은 춘추지의(春秋之義) 곧 삼대 이후 한·당·송의 중화문명을 계승한 명에 대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리론(義理論)이었고, 그것을 현실의 경험으로 받쳐준 것이 바로 재조지은이었다. 재조지은 의식에 한 뿌리를 둔 이런 사조는 북벌론이 시의성을 잃은 후에도 명에 대한 의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꾸준히 진행된 국가사업의 주요 명분이 되었다. 만동묘(萬東廟)대보단(大報壇) 제례는 그 좋은 예이다.

[참고문헌]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존주휘편(尊周彙編)』
■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 유보전, 「임진란후 조선 대명인식의 변화: 재조지은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11, 2006.
■ 정해은, 「충무공 이순신과 선조: 호성공신 선정 논란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이순신연구논총』11, 2009.
■ 한명기, 「재조지은과 조선후기 정치사: 임진왜란~정조대 시기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59, 2007.

■ [집필자] 계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