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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36년(인조 14) 12월 8일에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해 50일간 진행되다가 조선의 항복으로 종결된 전쟁.
[개설]
정묘호란 때 조선과 청(후금)이 맺은 정묘화약(丁卯和約) 이후에도 조선과 청나라는 갖가지 문제로 인해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에 청 태종(太宗)이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해 옴에 따라 두 나라의 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중화문명의 적통을 이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처럼 여기던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했고, 그러자 청 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했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선의 방어선은 쉽게 뚫렸다. 겨우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의 지배층은 이렇다 할 군사작전도 구사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렸다. 국왕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농성하며 항전했으나, 강화도 함몰 소식 이후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왕이 직접 성을 나와 항복함으로써 병자호란은 50일 만에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후금(청)의 군사력을 경험한 조선 조정은 가급적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갖가지 사안을 놓고 양국 사이의 이해가 대립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정묘화약 당시 후금(청)에게 약속한 조선과 명의 단교(斷交)가 지켜지지 않은 점, 가도(椵島)에 주둔해 있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처리 문제, 요동 난민 처리 문제, 개시(開市) 문제, 세폐(歲幣) 문제 등이 줄을 이으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斥和)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청 태종이 19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기존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해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척화파의 주장이 더욱 커져 청나라 사신을 인견도 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등 강경노선 일변도였다. 이에 청 태종은 같은 해 11월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조선이 응답하지 않자 12월 초순에 바로 대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
[발단]
정묘화약 이후부터 줄곧 이어지던 양국 간의 긴장은 조선이 여전히 명나라와 교통한 일과 후금(청)의 태종이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한 일 등으로 서로 화해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으로서는 중화문명의 상징인 명나라와의 전통적인 군신관계를 끊을 수 없었고, 청나라로서는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청의 배후에 위치한 조선을 확실히 제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 태종의 즉위식에 참예한 조선 사신들이 끝내 청 태종에게 절을 하지 않은 일과 1635년 11월에 청 태종이 조선의 왕자 및 주전론(主戰論)을 편 대신들을 압송하라는 취지의 국서를 조선이 무시한 일이 계기가 되어, 1636년(인조 14) 12월에 12월에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침입했다.
[경과]
명나라를 중화의 정통으로 보는 인식이 절대적인 조선에서는 ‘오랑캐’인 청나라와 화친을 거부하는 척화론(斥和論)이 득세했지만, 국가의 방어태세는 매우 허술했다. 10만이 넘는 대군으로 1636년(인조 14) 12월 8일에 압록강을 건넌 청군(淸軍)은 빠른 속도로 남하해, 선봉대는 불과 엿새 만인 14일에 이미 개성을 지나 한양 근교 홍제원(弘濟院)까지 도달해서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을 위협했다. 급보를 접한 국왕과 조정 신료들이 미처 강화도로 피신해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없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정황은 전쟁 발발 직후의 전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잘 보여준다. 청의 침입 사실이 한양의 조정에 도달한 날이 12일이었으니, 조선 조정이 급보를 받은 지 이틀 만에 이미 청군이 한양 인근에 출몰한 셈이었다. 청군 선발대의 이런 급속한 남진은 이미 압록강 도강 전에 계획된 바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맞아 조선 조정은 방어와 왕의 피난이라는 조치를 취했으나, 도성의 관민이 피난을 시작한 14일에는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건너 한양 근교로 진입할 때였다. 이런 탓에 14일 새벽에 한양을 떠난 왕자, 세자빈, 종실 및 한양 사대부가의 가족들은 일부 피해를 입으면서도 강화도로 건너갈 수 있었으나, 그날 오후에 도성을 나선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도중에 길이 막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후에 서둘러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입성(入城) 후 인원을 점검한 결과, 군사가 13,800명이고 관료와 서리와 노복을 합쳐 1,000여 명, 도합 14,800여 명이었다. 그러나 너무 급박하게 입성한 탓에, 이 정도 인원이 먹을 식량은 두 달 치가 채 되지 않았으며, 화약을 비롯한 무기도 여의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청군에게 산성 전체를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에서 외부와의 교통조차 어려워지면서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왕실을 호위하는 근왕병(勤王兵)의 지지부진함과 패전 소식을 접하면서 산성 안의 조선 조정은 척화보다는 주화 쪽으로 점차 기울었다.
고립무원 상황에 처한 남한산성의 상황은 곧 청군에게 간파되었고, 청군은 소규모 공격으로 조선의 방어태세를 탐지하는 한편 시간적 여유를 갖고 조선에 항복을 요구했다. 그나마 농성 초기에는 소규모 전투일지라도 조선군의 승리를 통해 사기를 진작할 수 있었으나, 12월 29일에 출성한 조선군 300여 명이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다시피 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져, 이후로는 감히 출성해 교전하지 못했다. 그 대신, 몇 차례 대공세를 취해 온 청군을 분전해서 격퇴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전투 와중에도 조정의 최대 사안은 전투보다는 강화교섭이었다.
농성 초기에 청의 장수 마부대(馬夫臺)와 조선의 최명길(崔鳴吉) 사이에 협상이 오갔는데, 임금의 아우와 왕자, 더 나아가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는 청나라 측의 요구를 조선 측이 거절하면서 결렬되었다. 조선의 완강한 태도를 보고, 마부대가 인질에서 세자는 제외하였으나, 조선 입장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요구는 지나친 것이었다. 따라서 여전히 척화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고, 강화협상은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 태종이 직접 주력부대인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당도한 12월 30일을 고비로 강화의 조건은 조선에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청 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까지 직접 와서 항복을 요구한 이상, 강화를 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도 최고통수권자인 국왕이 직접 성을 나가 어떤 식으로든 청 태종과 대면해야 할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 태종은 국서를 보내 조선을 질책하고 조선 왕이 직접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항복은 하되 왕이 성 밖으로 나가지는 않은 채 성의 망루에서 청 황제를 전송하는 형식을 취하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번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추위가 심해지고 식량도 거의 떨어졌으며 사기도 저하되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어, 시간이 흐를수록 주화파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궁지에 처한 조선의 유일한 희망은 강화도로 피신한 왕실 및 조정 관료들의 항전이었다. 그러나 1637년(인조 16) 1월 22일에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형세는 더욱 극한으로 치달았다. 전쟁 발발 당시 강화도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강화유수겸주사대장(江華留守兼舟師大將) 장신(張紳)은 구체적인 방어계획을 세우지 못했으며, 강화도로 피신한 왕자와 종실의 안위를 책임진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 또한 강화도가 천혜의 보장처(保障處)라는 사실만 믿고 이렇다 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반면에, 한 달이 넘도록 강화해협의 도강에 애를 먹던 청군은 인근의 소선(小船)을 모아 군사를 분산해 싣고 1637년(인조 16) 1월 21일에 강화도의 갑곶을 향해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갑곶의 건너편인 통진(通津)에서 발포한 홍이포(紅夷砲)로 인해 이미 와해된 갑곶 수비대를 손쉽게 격파한 청군은 바로 대대적 도강을 시작했고, 선발진은 강화성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 방어의 책임을 맡은 두 장수인 장신과 김경징은 모두 광성진(廣城鎭)으로 퇴각한 후에 항전을 포기한 채 즉각 본토로 도주했다. 22일에 강화성이 함락되자, 그 관아에 있던 왕족과 사대부가의 식솔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따라 모두 청군에 항복했으며, 일부는 순절했다. 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어 27일에 삼전도로 이송되어 분산, 수용되었다.
이미 항전의 의지를 잃고 항복을 고려하던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은 강도함몰 소식을 26일에 전해 듣자마자 그것을 구실로 삼아 바로 전격적으로 항복을 결정했다. 정온(鄭蘊) 등 일부 척화파 인물의 반대가 여전히 거셌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다. 이에 청나라 측과의 조율을 통해 항복의식 절차를 합의한 조정은 마침내 1월 30일에 국왕 인조의 출성으로 항복에 임했다.
이날 아침에 인조는 청 측의 요구대로 융복(戎服)을 입은 채 산성의 서문(西門)을 나와 산을 내려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면서 항복의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조선으로서는 치욕적인 이른바 정축화약(丁丑和約)이 체결되었는데, 그 골자는 조선 국왕이 명나라로부터 조선의 왕임을 인정받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청 황제에게 바치고 완전한 군신관계를 맺는 것, 소현세자 이하 왕자와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보내는 것, 청의 명나라 공격을 돕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약조 후에 청군은 바로 철군을 시작했는데, 가도(椵島) 공략 과정과 청의 명나라 정벌 전쟁에 조선의 병력과 군량을 보내 돕는 문제로 인해 양국 사이의 긴장은 여전했다. 그렇지만 이미 청나라의 위용에 굴복한 조선 조정은 내키지는 않지만 청나라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청 태종의 명령의 따라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운 것도 이런 노선의 결과였다. 이런 치욕을 씻고자 효종대부터 북벌(北伐) 논의가 거셌으나, 현실로 구체화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대개 삼전도 항복으로 인한 내부의 충격을 수습하기 위한 의도로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