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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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호부민(饒戶富民)

서지사항
항목명요호부민(饒戶富民)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부민(富民)
동의어요민(饒民), 부호(富戶), 호민(豪民)
관련어원납인(願納人), 사진인(私賑人), 보진인(補賑人), 부민권분논상별단(富民勸分論賞別單), 납속보관지법(納粟補官之法)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농업이나 상업적 경제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자들을 일컫는 말로 정부의 재정 보전정책의 주요 대상이 된 세력.

[개설]
조선후기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상공업 발달을 배경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요호부민이라 하였다. 정부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을 납속(納贖)정책의 주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요호부민을 대상으로 공명첩(空名帖)을 판매하거나 이들에게 기민(饑民)을 돕도록[勸分] 장려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진휼에 필요한 재물을 자원하여 바치거나[願納], 또는 그들 개인의 곡식으로 진휼하는[私賑] 행위도 권면하였다. 하지만 부민이라는 이유로 지방관의 강매(强賣)·강탈(强奪)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신분 지위가 높지 않았던 요호부민들은 정부의 납속정책에 편승하여 신역을 면제받거나, 직임을 부여받아 향촌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19세기에는 사회 변화를 꾀하는 민란의 한 주체가 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자급자족의 경제 구조를 가졌지만, 그중에서도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요호부민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주로 농지 개간과 농장 경영, 농법의 개량과 상업 작물의 재배, 상공업 활동, 광산 개발, 국제 무역, 고리대금업 등을 통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경제 환경의 변화에 편승하여 요호부민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이미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호조(戶曹)의 재정이 200,000석(石)을 넘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재정 수요는 증가하는 반면 수입은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갑작스러운 이민족의 침입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긴급한 재정 수요는 늘 부유한 백성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부유한 백성은 국가 재정 보용(補用)정책인 납속정책의 주 대상이 되었다. 부유한 백성을 대상으로 한 납속정책은 1480년(성종 11) 납속한 사람에게 관직을 주는 납속보관지법(納粟補官之法)에 대한 논의로 시작되었다[『성종실록』 11년 9월 12일]. 그 후 1485년(성종 16)에 이르러 지방 부민(富民)의 존재가 드러났다. 충청도 진천(鎭川) 지방에서 8,000석 정도의 곡식을 가진 사노비 임복(林福)이 곡식 3,000석을 바쳐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 양민이 되었던 것이다[『성종실록』 16년 8월 17일].

이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부민 가운데 납속자를 모집하는 정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조대에 쌀 4,000석을 바쳐 수령이 된 평안도 개천(价川) 부민 이춘란(李春蘭)[『선조실록』25년 5월 23일], 광해군대에 10,000여 마리의 말(馬)을 바쳐 부총관(副摠管)에 오른 제주도품관 김만일(金萬鎰)[『광해군일기』 12년 8월 15일] 등이 부민으로 주목을 받았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흉년과 기근이 지속되면서 부민을 대상으로 재물 기부를 권장하는 권분(勸分)이 더욱 장려되었다. 이 시기 정부는 진휼이 이루어지는 설진(設賑) 지역 부민이 스스로 재물을 바치는 원납(願納), 부민의 개인 곡식으로 진휼을 돕는 사진(私賑)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진휼이 끝나면 각 도 감사가 진휼을 도운 사람의 거주지, 직역(職役), 성명, 납부한 곡식이나 돈의 수량을 기록하여 진휼청에 보고하고 포상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1732년(영조 8)에 「부민권분논상별단(富民勸分論賞別單)」이 제정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영조실록』 8년 7월 5일].

[변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부민들은 정부의 납속정책에 편승하여 천민의 신분을 면하거나 역(役)을 면제받아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관직을 얻어 관계(官界)에 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양반을 사칭하거나 호적을 고쳐 신분 상승을 노렸으며, 향촌 사회에서 면임(面任)·향임(鄕任) 등에 차출되어 영향력 증대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민에 대한 수탈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공명첩 판매나 권분 과정에서 부민에 대한 강매·강탈이 관행화되었다[『영조실록』 8년 2월 20일]. 이는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고과(考課)를 진휼의 성과 여부에 두는 제도적 모순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부민을 동원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은 빈민이나 부민 어느 한쪽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하여 이들 모두를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요호부민은 관권에 의하여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 사회 불만 세력으로 성장하여 19세기 민란에서 자금 조달책을 맡는 등 민란의 주체 세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우서(迂書)』
■ 『목민심서(牧民心書)』
■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 사회 연구: 지배와 저항의 구조』,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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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석종,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 조상제·권인혁, 『한국 근대 농민 항쟁사』, 느티나무, 1993.
■ 한국역사연구회 저, 『1894년 농민전쟁연구 2: 18·19세기의 농민항쟁』, 역사비평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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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집필자] 서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