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대의리(大義理)라는 단어는 천지에 내세워도 굴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군신 간의 의리를 말하므로 대의(大義)와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 의미 이외에, 의리 탕평을 표방한 정조대 이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시비(是非)가 확정된 커다란 군신 의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대상은 대개 세제(世弟)·세자(世子)·세손(世孫) 등 장래의 군주인 저군(儲君)의 즉위를 둘러싼 충역(忠逆) 의리에 한정된다.
[내용 및 특징]
숙종대에 가장 치열했던 당쟁은 결국 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장래의 군주를 선택하려는 택군(擇君)의 시도로까지 이어졌다. 소론의 보호로 군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경종에게 후사 생산의 가능성이 없어지자, 세제인 연잉군(延礽君)의 계승에 대한 찬반 여부로 논쟁이 생겼다. 이로 인해 1721년인 신축년(경종 1)과 1722년인 임인년의 옥사를 거친 후에 영조가 즉위하였고, 이후로도 이를 둘러싼 충역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에 관한 국시 곧 신임옥사에 대한 신임의리가 확정된 것은 1755년(영조 31) 을해옥사 이후 확정된 의리에 입각하여 『천의소감(闡義昭鑑)』이 편찬된 시점이었다.
1762년(영조 38)에는 대리청정 중인 세자를 폐위시킨 임오화변이 발생하였고, 영조는 스스로 이에 관한 의리를 확정하여 제시하였다. 통상 이를 아무 해의 의리[某年義理]라 하였다. 임오화변 이후 세손이 저군(儲君)의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세손에 대해서도 그 지위를 흔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영조가 지시한 세손 대리청정을 저지하려 했던 시도가 그것이다. 정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세력을 역적으로 처단하고 『명의록(明義錄)』에서 그 의리로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변천]
정조대 이후에는 이들 세 의리를 각각 신임 대의리, 모년 대의리, 『명의록』 대의리라 지칭하며 그 위상을 한껏 높였다[『정조실록』 즉위년 8월 6일] [『정조실록』 12년 11월 26일] [『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이들 대의리 존중의 의지를 공표하는 동시에 이들을 군신 간의 대의리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세 의리는 별개이지만, 모두 저군의 승계 문제에 신하들이 부당하게 개입하려 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합의 명분은, 천지와 함께 영원한 진정대의리(眞正大義理)를 확립한다는 것이었다[『정조실록』 19년 10월 29일].
정조의 의리 통합 시도는 영조가 확립한 모년 대의리와 정조가 확립한 『명의록』 대의리를 수정하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구상은 정조 말년으로 갈수록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었다[『정조실록』 23년 3월 24일]. 이는 당쟁 때문에 충역론이 크게 충돌하였던 경종·영조대 이래의 경험을 준수하면서도, 이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변통을 모색하였던 정조의 지향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김문식, 「정조(正祖) 말년의 정국 운영과 심환지(沈煥之)」, 『대동문화연구』66, 2009.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