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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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당(東黨)

서지사항
항목명동당(東黨)
용어구분전문주석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한양 동촌을 기반으로 하여 이천보가 이끌던 노론 당파.

[개설]
영조대 중반 이후 노론 내에서 분화한 동당(東黨)은 이천보(李天輔)를 영수로 하여 노론의 청론을 주도하였다. 동당은 1761년(영조 37)에 영수인 이천보가 사망한데다가, 임오화변 이후 북당(北黨)남당(南黨)으로 재편된 정국 구도에서 양척론(兩斥論)을 견지하며 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여 쇠퇴하였다. 정조대에는 시파(時派)로 계승되었다. 이천보가 한양의 동촌(東村)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동당이라 불린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동당은 영조대 중반 한양의 동쪽인 낙산(駱山) 인근에 거주하던 노론 관료 가문을 기반으로 하며 이천보를 영수로 하는 당이다. 이들은 노론 청론을 표방하지만 의리 탕평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 때문에 동당은 영조대 중반 노론의 신임옥사에 대한 의리가 거의 관철된 이후에는 그 의리를 부정하지 않는 소론·남인도 등용한다는 노선 하에 인사권을 주관하였다. 이로 인하여 같은 노론 청론으로서 일진일퇴론(一進一退論)을 견지한 남당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노론의 우위가 확실해지자 숙종대 후반 이래 노론 내에서 화당(花黨)·낙당(駱黨)의 노선 차이가 재연된 것이다.

동당은 홍봉한의 북당과 김구주가 가세한 남당과는 달리 척신(戚臣)과 직접 연계되어 있지 않았으며, 주로 조정에서 누대로 벼슬하던 문장 가문과 낙론(洛論) 학맥을 기반으로 하였다. 이들은 청론 사대부의 견지에서 척신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였고, 의리론에서도 남당 강경 세력의 공격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권력 기반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영조대 중반 이후 세자 보호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동당은 북당과 보호 노선을 함께하였고, 이종성(李宗城)으로 대표되는 소론 보호론자와도 적극 연대하였다. 그러던 중 영조 37년에 이천보가 사망하자 동당은 구심점을 잃었다[『영조실록』 37년 1월 5일]. 게다가 임오화변 이후에는 영조의 수습책이 왕을 포함한 어떤 세력도 책임을 지지 않는 방향으로 설정되자, 이에 항의하던 동당계(東黨系) 산림 송명흠(宋明欽)과 그를 옹호하던 관료들이 대거 배척되어 새로운 구심이 형성될 수도 없었다[『영조실록』 39년 7월 4일].

동당계 인사들은 홍봉한과 김구주 양 척신을 모두 비판하는 양척론(兩斥論)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는 남당이 홍봉한을 반대하는 공홍(攻洪), 곧 살홍론(殺洪論)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므로 남당은 동당이 홍봉한을 비호하는 부홍파(扶洪派)라고 비판하였다. 영조대 후반 북당이 주도하고 남당이 대결하는 척신 위주 정국 구도에서 양척론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동당계 인사들은 소외되어 세손의 즉위 과정에도 특별한 기여를 할 수는 없었다.

[변천]
정조는 우현좌척(右賢左戚), 즉 사림을 등용하고 척속을 배제한다는 노선 아래 궁료와 청론 사대부의 지원을 받아 즉위에 성공하였다. 때문에 즉위 후에는 두 척신을 모두 배제한 채 궁료와 청론 사대부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대 후반에 지리멸렬했던 동당계 인사들이 노론 청론의 일원으로서 다시 진출하였다. 이들은 정조의 의리탕평 노선에 호응하고 소론 서명선에 협력하는 시파(時派)로 활동하면서 정조대 전반기 정국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 『은파산고(恩坡散稿)』
■ 『홍익정유사(洪翼靖遺事)』
■ 김성윤, 『조선 후기 탕평 정치 연구』, 지식산업사, 1997.
■ 박광용, 「조선 후기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최성환, 「정조대 탕평 정국의 군신 의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집필자] 최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