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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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당(蕩平黨)

서지사항
항목명탕평당(蕩平黨)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탕당(蕩黨)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영조대 탕평을 주도하던 집권 세력.

[개설]
탕평당은 탕당(蕩黨)이라고도 하며, 영조 연간에 탕평을 주도했던 집권 세력이다. 영조 초부터 왕의 탕평 추진 의도에 따라 노론의 홍치중·김재로와 소론의 조문명·조현명·송인명 등을 중심으로 탕평파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1729년(영조 5) 이후 탕평파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 이미 1731년경에는 탕평당이라 불릴 만큼 세력이 공고해졌다. 1741년 신유대훈(辛酉大訓) 이후 구성원들이 확대되었으며, 영조대 후반 외척인 조재호와 홍봉한 등을 중심으로 고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영조는 즉위 직후 인현왕후의 동기라는 이유로 민진원을 석방시켜 등용하며, 노론들의 진출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노론의 소론에 대한 토역(討逆) 요구가 거세지면서 영조는 자신이 추구하던 탕평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국이 흐르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자신의 탕평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노론·소론 내에서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1725년 영조는 소론 측 조문명을 발탁한 뒤 소론계 인사만으로 탕평을 추진한다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방향을 선회하여 노론 내에서도 탕평 세력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때 주목한 인물이 홍치중으로, 그는 영조의 배려로 상신(相臣)에 오른 뒤 노론의 소론 토역론(討逆論)에 대해 왕의 입장에 동조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홍치중은 또한 소론 출신의 송진명·윤순 등의 출사(出仕)를 요청하는 등 왕이 의도한 조제보합(調劑保合)적인 탕평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노론의 계속된 토역 요구로 영조는 탕평의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하였고, 결국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하였다. 이후 소론의 이광좌를 비롯해 조태억 등을 정승으로 포진시키는 한편, 앞서 한때 발탁하였던 조문명을 이조 참의에 임명하였고, 정석삼과 송인명을 승지에 배치하여 자신의 탕평을 좌우에서 돕도록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영조 즉위 후 왕의 주도하에 추진된 탕평책에서 소론 측 조문명과 송인명 등을 중심으로 탕평파가 형성되었다. 탕평파는 조문명·조현명 형제를 비롯해 송인명과 노론 출신의 홍치중·김재로 중심으로 결집하였는데, 이들은 혈연과 상호 혼인 관계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들이 결집되게 된 데에는 숙종대 황극탕평론을 제창한 박세채(朴世采)에 대한 학적 계승 의식이 주요한 요인이었다. 또한 영조대를 전후로 이루어진 국혼 관계로 연결된 척신 세력이 탕평파의 일부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탕평당의 세력으로는 정언섭과 같은 지방 출신 인사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탕평당의 외곽 세력으로 포진하였다,

탕평파는 왕 주도의 탕평을 보좌하는 한편, 영조대 전반기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의 처리 과정도 주도하였다. 시기별로 각자의 출신에 따라 입장 차이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1740년 탕평파의 주도하에 그때까지 신원되지 않았던 노론 김창집과 이이명을 신원하는 한편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소론의 무고(誣告)로 판정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이끌어 냈다.

한편 탕평파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면서, 1732년경에는 조현명과 송인명의 독주를 견제하는 ‘조송건곤(趙宋乾坤)’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영조실록』 8년 9월 26일]. 또한 1731년에는 탕평당의 등장으로 풍문과 절의가 모두 사라져 사람들이 아름다운 관직과 좋은 작위만을 바란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탕평당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다[『영조실록』 7년 10월 26일].

[변천]
1741년 탕평파의 협조 속에서 신유대훈(辛酉大訓)이 반포되면서 노론 명분이 승리하였다. 단, 신유대훈은 노론·소론 모두에게 불만을 초래하여 양쪽에서 수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유대훈은 노론·소론 출신 탕평파의 합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을 우려하여 수정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시기 활동하던 탕평파는 소론 출신의 정우량을 비롯해 노론 출신의 원경하·홍계희, 남인 출신의 오광운·홍경보 등이 참여하였다. 그동안 탕평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던 노론 준론계인 유척기와 이천보 등도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탕평파의 확대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추진된 탕평책으로 정국이 안정되고, 이를 바탕으로 제도 개혁이 추진되는 등 탕평책의 성과가 가시화되는 시기였다.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와 심정연의 시권(試券) 문제로 발생한 옥사를 거치면서 소론은 당색으로서의 의미를 거의 상실하였다. 이런 즈음 소론 출신의 조재호가 탕평을 주도하였고, 이후 1761년 이후에는 홍봉한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홍봉한이 탕평을 주도하던 시기, 상신(相臣)에 포진된 인물의 대부분은 홍봉한과 관련된 인물들이거나 왕의 외척이었다.

[참고문헌]
■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형성과 벌열화(閥閱化)」, 『조선시대사학보』21, 2002.
■ 정만조, 「영조대 초반의 탕평책과 탕평파의 활동: 탕평 기반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진단학보』56, 1983.
■ 정만조,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탕평책의 재정립: 소론 탕평에서 노론 탕평으로의 전환」, 『역사학보』111, 1986.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