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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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해역옥(乙亥逆獄)

서지사항
항목명을해역옥(乙亥逆獄)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나주괘서지변(羅州掛書之變), 역지괘서지사(逆志掛書之事)
관련어괘서(掛書), 무신란(戊申亂), 천의소감(闡義昭鑑)
분야정치
유형사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755년(영조 31) 전라도 나주의 객사에 괘서가 걸린 것을 계기로 발생한 옥사와 심정연의 시권 문제로 발생한 옥사.

[개설]
을해역옥은 1755년 나주의 객사(客舍)에 걸린 괘서(掛書)가 문제가 되어 발생한 옥사와 심정연의 시권(試券) 문제로 발생한 옥사를 합쳐 부르는 명칭이다. 나주에서 발생한 사건은 나주괘서지변(羅州掛書之變) 또는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이라고도 한다. 또한 괘서를 주도했다고 알려진 윤지(尹志)의 이름을 따서 역지괘서지사(逆志掛書之事)라고도 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의 인물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자신의 집권 의리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천명한 『천의소감(闡義昭監)』을 간행하였다.

[역사적 배경]
영조는 즉위 직후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세력을 불러들여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노론의 소론에 대한 보복 정치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영조가 의도했던 탕평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 내에서 탕평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탕평파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소론 계열과 남인 계열 일부가 정치에서 소외되었고, 이들의 주도하에 1728년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였다. 무신란의 처리 과정에서 일부 남아 있던 세력들은 계속 불만이 커졌고, 영조나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세력들은 이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 사안이었다. 을해역옥은 이런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동하면서 발생한 옥사이다.

[발단]
사건은 1755년 전라감사 조운규가 나주의 객사인 망화루(望華樓) 기둥에 괘서가 걸려 있다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시작되었다[『영조실록』 31년 2월 4일]. 괘서가 걸리자 그 범인으로 경종 연간에 신임옥사(辛壬獄事)나 무신란에 관련되었던 소론이나 남인들이 지목되었다. 당시 나주에는 이런 혐의를 받는 소론계 인물로 윤지가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윤지는 윤취상의 아들로, 윤취상은 경종 연간에 훈련대장과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김일경·박필몽 등과 함께 노론 세력의 축출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경종실록』 4년 1월 11일]. 윤취상은 1725년 노론 측에 의한 국문 과정에서 죽었다. 아들 윤지 역시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인 1725년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임인옥사의 주범인 목호룡의 당(黨)으로 지목되었다[『영조실록』 5년 11월 19일].

[경과]
괘서의 범인으로 지목된 윤지는 결국 체포되었고, 윤지가 아들인 윤광철과 윤희철을 시켜 괘서를 내걸었다는 내용으로 사건의 결론이 모아져 갔다. 이럴 즈음인 1755년 2월 25일 윤지가 조사 과정에서 죄를 시인하지 않고 물고(物故)되었다. 이후 윤지의 주변 인물들로 수사 대상이 확대되었다. 윤지와 친분이 있던 나주 지역 아전을 비롯해 현지에서 유배 생활하던 사람들, 또 윤지와 편지를 주고받던 소론 계열 인사 등이 모두 조사 대상이었다. 이외에도 윤지의 아들인 윤광철과 교류했던 인물들 역시 조사 대상이 되었는데, 대부분이 소론 혹은 남인의 당색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점은 영조나 당시 당국자들에게 무신란 잔여 세력들을 토벌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박찬신·조동정·조동하·김윤 등 많은 소론 측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윤득구 등은 원배(遠配)되었다. 또한 경종 연간 소론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태구·김일경 등에게는 역률(逆律)이 더해졌다.

괘서 사건이 일단락된 뒤 이를 기념하는 과거 시험인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심정연이 영조와 조정을 비난하는 시권과 과거 시험 주제가 기록되지 않은 변서(變書)를 제출하였다[『영조실록』 31년 5월 2일]. 심정연은 사건이 발생한 이틀 뒤인 5월 4일에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심정연이 앞서 괘서 사건의 주인공인 윤지 일족인 윤혜, 그리고 김일경의 종손인 김도성 등과 역모를 도모했다는 내용으로 확대되어 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다.

결국 앞선 윤지의 괘서 사건과 심정연의 시권으로 옥사가 확대되어, 그동안 영조나 당국자에게 반기를 들던 소론과 남인 일부 세력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영조와 집권 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있었던 역모 사건을 정리한 『천의소감』을 편찬하였다. 이로써 영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집권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배혜숙, 「을해옥사의 참여 계층에 관한 연구: 나주 괘서 사건을 중심으로」, 『백산학보』40, 1992.
■ 이상배, 「영조조 윤지 괘서 사건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연구』76, 1992.
■ 조윤선, 「조선 후기 영조 31년 을해옥사의 추이와 정치적 의미」, 『한국사학보』37, 2009.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