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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정유년인 1717년(숙종 43) 숙종과 노론 측 이이명이 사관(史官)을 배석시키지 않고 단독으로 대면한 사건.
[개설]
정유독대는 1717년 숙종과 노론의 영수격인 이이명(李頤命)이 단독으로 면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을 뒤이을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노론은 독대를 근거로 연잉군과 연령군 두 왕자에 대한 보호를 자처하였고, 소론은 노론이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의심하였다.
[역사적 배경]
1694년 갑술환국 이후 공존하던 노론과 소론의 균형은 1716년 이른바 왕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노론이 정치적·학문적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숙종은 노론의 영수격인 이이명을 별도로 불러들여 독대를 행하였다.
[발단]
1717년 7월 10일 오후 1~3시경인 미시(未時)에 왕이 희정당에 나아가 좌의정 이이명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이이명은 승지 남도규, 가주서 이의천, 기주관 김홍적, 기사관 권적과 함께 합문 밖으로 나아갔다. 곧이어 사알(司謁)이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이이명 혼자만 입시하게 되었다[『숙종실록』 43년 7월 19일].
이이명이 입시한 지 얼마의 시간이 시간 뒤 남도규나 권적 등은 몇 차례 논의 끝에 승전색을 통해서 입시하겠다는 의사를 전하였고, 왕의 허가로 입시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왕과 이이명의 독대가 끝나 이이명이 물러나와 자기의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다.
[경과]
이 독대는 연로한 숙종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내재되어 온 일반의 의혹을 깊게 하였다. 또한 지금까지는 사문(斯文) 시비 위주로 전개되어 오던 노론·소론 간의 대립을 왕위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한 충역(忠逆) 시비 분쟁으로 변질케 하였다. 소론은 김춘택 이래 노론이 그들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왕세자를 바꾸려 획책하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노론은 그들대로 왕의 독대를 통한 특별한 부탁이라 하여 세자의 대리청정을 보필하는 한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내밀하게 연잉군, 연령군 양 세자의 보호를 자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