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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낙당(駱黨)은 18세기 초반 노론 세력 내에서 분화된 분파의 하나이다. 당주(黨主)인 조태채(趙泰采)가 서울의 낙동(駱洞)에 거주하였기에 붙여진 명칭으로, 경종대부터 정치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또 다른 분파인 화당(花黨)과 대립하였다. 영조 초반에 소멸된 것으로 파악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세기 노론의 경우는 사상적으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과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간의 논쟁인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일명 호락논쟁(湖洛論爭)을 계기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경종~영조 초에는 다시 낙론 내에서 화당과 낙당, 파론(坡論)으로 나뉘었다. 낙당의 명칭은 당주인 조태채가 서울의 낙동에 거주한 데서 유래하였다. 화당과 낙당의 분리에 대해 『영조실록』에서는 낙당의 당주인 조태채가 화당의 당주인 이만성(李晩成) 등을 중심으로 한 사림들에게 배척 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영조실록』 1년 6월 1일]. 조태채는 이미 숙종 20년대 후반부터 일부 사림에게 당시의 우의정이었던 신완(申琓)의 문객(門客)이라거나 배후에 가깝다는 등의 비난을 받았다[『숙종보궐정오실록』 25년 7월 3일].
화당과 낙당의 대립이 본격화된 것은 경종 연간이다. 즉 1721년(경종 1) 연잉군(延礽君)의 세제 책봉 건에 대해 화당 계열에서는 조속한 책봉을 요청하였던 것에 비해, 낙당 계열에는 신중한 자세로 접근하였다. 단, 이런 대립이 경종 연간 노론 계열의 위기 속에서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다가 영조 즉위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조직 및 역할]
낙당은 당주인 조태채 이외에도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 등이 속해 있었다. 낙당은 박세채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파론(坡論)을 흡수하며 세를 확산하였다. 그리하여 파론 계열의 김유(金楺)와 그의 아들인 김취로(金取魯), 박사익(朴師益)과 그 동생 박사성(朴師聖), 신방(申昉), 조언신(趙彦臣), 임징하(任徵夏) 등이 포함되었다.
[변천]
영조 즉위 직후 도당록(都堂錄)의 권점(圈點) 문제가 드러나면서 낙당과 화당의 대립은 노골화되었다. 도당록은 조선시대 관원들이 당상관으로 진출할 때 거쳐야만 하는 과정으로, 각 붕당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속한 세력의 확산이라는 점과 관련해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 시기 도당록에서 낙당의 민진원과 이관명 등이 논의하여 8명을 선발한 후 추가로 10명을 더 선발하였는데 여기에 임징하·이의천을 포함시켰다. 낙당 계열에서 이들을 도당록에 포함시킨 이유는 경종 연간에 화를 당한 노론 사대신을 비롯한 노론 세력의 신원과 소론에 대한 보복에 공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당 계열인 대제학 이의현(李宜顯) 등이 도당록은 실력을 기준으로 면밀하게 선발해야지 많이 취할 필요는 없다며 반대하면서 대립하였다.
낙당은 이후 소론이 집권하는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과 1728년 무신란(戊申亂) 등을 거치면서 자체적으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