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1737년(영조 13) 왕이 노론과 소론의 대표적 인사들을 불러 놓고 앞으로 당쟁을 하지 않겠다고->는 다짐을 받은 사건.
[개설]
1729년 기유처분(己酉處分) 이후 노론 측에서 김창집과 이이명의 신원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기유처분의 내용은 탕평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노론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탕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1736년 이건명과 조태채의 시호가 회복되자 소론들이 반발하며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이에 같은 해 8월 20일 영조는 탕평파와 노론·소론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불러 놓고 지나간 일을 되풀이하지 말 것과 앞으로 새로운 세상에서 당쟁을 되풀이하지 말 것을 천명하였다. 이를 혼돈개벽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영조는 즉위 이후 순차적으로 경종 연간에 있었던 신임옥사(辛壬獄事)와 관련된 정치 의리를 조정해 나갔다. 그 첫 번째 단계가 1729년의 기유처분으로, 노론 사대신 중 이건명과 조태채를 복관시키는 한편 이이명과 김창집은 계속 역안(逆案)에 두었다. 이후 노론 측에서는 이이명과 김창집의 신원에 대한 요구를 계속하였지만, 영조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1736년 3월 탕평파인 좌의정 김재로와 우의정 송인명의 발의로 이건명과 조태채의 시호가 회복되었다. 기유처분에 대한 최초의 수정이었다. 이 조치가 발표되자 소론 세력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1737년에는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를 필두로 수십 명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이이명과 김창집을 비난하였다.
영조는 이런 상황을 탕평 정국의 위기로 판단하고 일단 감선(減膳)을 하명하고 이어 분쟁을 야기한 장본인들을 국문하거나 삭출하였다. 또한 이광좌를 영의정에 제수하면서도 탕평파들을 계속 주요 관직에 배치하였다. 이는 탕평 정국을 유지하려는 영조의 의도 때문이었다.
같은 해 8월 28일 영조는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희정당(熙政堂)으로 자리를 옮긴 뒤 노론과 소론 계열의 이광좌·이의현을 비롯해 김재로와 송인명 등 대신을 위시한 여러 신하들을 불렀다. 그는 택군설(擇君說)로 기유처분의 내용을 재차 확인하며 기왕의 당론에 관한 일은 모두 지나간 옛일로 돌리고[混沌] 앞으로는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는 당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開闢] 다짐을 받아 냈다[『영조실록』 13년 8월 28일].
[변천]
혼돈개벽으로 노론 측의 이이명과 김창집의 신원 운동은 다시 좌절되었고, 탕평은 일단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정국이 근본적으로 안정화된 것은 아니었다. 노론은 영의정 이광좌를 집중적으로 탄핵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는 개벽의 유시가 있었는데도 혼돈함이 다름없다고 하여 당시의 시세를 개탄하였다[『영조실록』 13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