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성균관 유생들이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할 때, 노란색 종이에 관리의 이름을 써서 붙이던 일, 또는 성균관 유생들이 학령을 위반한 경우 그의 이름에 노란색 종이쪽지를 붙이고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던 일.
[내용 및 특징]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부황은 주로 성균관에 기숙한 유생인 거재유생(居齋儒生)이 학령(學令)을 위반했을 경우에 내린 벌칙의 하나로, 명부에 있는 그의 이름 위에 노란색 종이쪽지를 붙여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1650년의 실록 기록에서, 예로부터 유생들이 어떤 죄악에 대해 부황하는 벌을 시행하였는지 승지들은 의논하여 아뢰라는 효종의 하교에 대해 옛날에는 부황이 유학자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삭적(削籍)보다 가벼웠는데 지금은 중벌이 되었다고 하면서 지난번 광해조 때에 유생들이 대사헌 정인홍이 선정신(先正臣) 이언적을 비방한 죄를 들어서 부황한 일이 있고, 요즘에는 폐조(廢朝)의 흉도들을 다 부황하였다는 정원의 회계[『효종실록』 1년 6월 29일]를 통해 부황은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인홍이 이언적의 문묘 종사 폐출을 주장하다가 ‘부황’하였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름에 누런색을 표시하면 성균관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55년의 실록 기록에, 국초 이래로 관학에 부황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죄가 명교(名敎), 곧 유학과 관련이 있는 경우 그의 이름에 노란 종이쪽지를 붙이면 직책이 비록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감히 조정에 서지를 못하였으니, 이것은 국조가 사론(士論)을 중시하고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바였다[『효종실록』 6년 10월 24일]라고 하여, 부황의 규정이 조선초기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부황을 실시한 것은 부정이나 비리를 범한 관료나 유생에 대해 표시를 하여 이들에 대한 등용을 막음으로써, 부정과 비리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조선후기 이후 부황은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삭적보다 중벌로 인식되었으며, 부황을 받은 사람은 사류에 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