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동인(東人)이 남인(南人)·북인(北人)으로 분열되고,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나뉘었는데, 대북파 중 이산해(李山海) 일파를 육북(肉北), 홍여순(洪汝諄) 일파를 골북(骨北)이라 하였다. 대북이 소북을 몰아낸 후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육북과 홍여순을 중심으로 한 골북의 분기가 이루어졌다. 1600년 박충간(朴忠侃)은 간략 상소문인 차자에서, "유성룡이 패퇴하자 신진(新進) 남이공의 무리가 붕류(朋類)를 불러들여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축출하고 동조하는 자는 끌어들여 어지러이 박격(搏擊)하였으므로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대북, 소북의 설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다시 골북·육북·피북(皮北)으로 나뉘어 듣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하였습니다."[『선조실록』 33년 1월 23일]고 하여, 북인 내부의 분열로 대북, 소북, 골북, 육북, 피북의 분기가 일어났음을 아뢰고 있다.
[조직 및 역할]
육북의 중심에는 이산해와 그의 아들 이경전과 대북의 실세 이이첨이, 골북의 중심에는 홍여순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의 「선조조고사본말」에는, "이산해가 다시 들어와 영의정이 되고 홍여순이 병조 판서가 되어 권력을 다투어 서로 공격하였는데, 홍여순의 논의를 주장하는 자를 골북이라 하고 이이첨의 논의를 주장하는 자를 육북이라 하였다."고 하여, 육북의 중심에는 이산해와 이이첨이, 골북의 중심에는 홍여순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당의통략』에는 "이산해와 홍여순이 서로 권력을 다투어 이산해의 당을 육북이라 하였고, 홍여순의 당을 골북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김시양이 쓴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도, "이산해가 다시 들어가 영의정이 되고 홍여순이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권세를 다투어 서로 공격하였다. 홍여순을 주축으로 한 파를 골북이라고 하고, 이산해를 주축으로 한 파를 육북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육북의 중심인물은 이산해임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