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의 관료와 선비들은 주자학을 정통 학문으로 신봉하였으므로, 주희(朱熹)의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중국 이외의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다른 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국가적 위기를 배경으로 주화론을 주장하는 관료가 나왔는데,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역시 주자학자로 주희가 주화론자들을 비판한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쟁 당시 국가의 현실이 전쟁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주화를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이들은 상대 당파나 정적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이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한 것은 계속된 전쟁으로 조선의 사회·경제적 현실이 붕괴 직전에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왜군과의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국가 재정은 고갈되고, 전국을 휩쓴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육(人肉)을 먹는 참상이 연출되었으며[『선조실록』 27년 1월 17일], 민란이 빈발하는 등 조선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유성룡의 주화론에는 같은 남인(南人)이었던 이원익(李元翼)이 동조하였으며, 서인(西人) 중에는 이정암(李廷馣)이나 성혼(成渾) 등이 동조하였다. 이로 인해 유성룡은 북인(北人)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관작이 삭탈된 일이 있으며[『선조실록』 31년 12월 6일], 성혼은 죽은 뒤 관작이 추탈되었다[『선조실록』 35년 2월 19일].
병자호란 당시에는 이귀(李貴)와 최명길이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인조반정(仁祖反正)공신(功臣)이었는데, 반정 초에 국방력 강화를 위한 제반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인조실록』 1년 윤10월 21일].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주자학 명분론과 의리론을 내세우는 수법론자(守法論者)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인조실록』 3년 3월 11일] [『인조실록』 11년 7월 12일]. 이러한 상황에서 후금(後金), 후대의 청(淸)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보고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이 대명(對明) 의리론(義理論)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주화론을 경권론(經權論)·사세론(事勢論)·명실론(名實論) 등으로 합리화하였다[『인조실록』 6년 7월 1일].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이후 최명길이 명나라와 내통하였다고 하여 심양(瀋陽)으로 끌려가 옥살이를 한 사실[『인조실록』 21년 3월 25일]은 그가 대명 의리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변천]
주화론은 주자학이 지배적인 풍토 속에서 명분과 의리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에 입각하여 나온 주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자였던 이귀와 최명길은 인조대에 국방력 강화를 위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방향은 조선 왕조 국가를 지탱하고 있던 양반제와 지주제를 약화 내지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 즉 개혁 지향의 경세론(經世論)은 당대에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이후 실학(實學) 사상으로 계승·발전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정치론은 탕평론(蕩平論)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주화론은 실학과 탕평론의 선구가 된다는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