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조선왕조실록』에서 ‘주화오국’이라는 죄목으로 가장 많은 탄핵을 받은 사람은 유성룡이다. 이것은 선조대 남인과 북인의 권력 투쟁 때문이었다. 1598년(선조 31) 북인인 이산해(李山海) 계열의 이이첨(李爾瞻)에서 비롯되어 이호신(李好信), 문홍도(文弘道)로 이어지는 탄핵 상소는, 유성룡에게 중국 남송(南宋) 때의 권간(權奸)으로 충신 악비(岳飛)를 죽이고 금(金)과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한 진회(秦檜)에 비유하여 주화오국이라는 죄목을 갖다 붙였다. 이로 인해 유성룡은 결국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04년에 회복되었다.
호란 당시 인조대에는 최명길이 주화오국으로 탄핵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윤황(尹煌)이 ‘이름만 화친이지 사실상 항복’이라고 후금과의 화의를 비판하면서, 주화오국의 신하를 참(斬)하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이귀(李貴)와 최명길을 가리킨 것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에는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이 최명길을 주화오국의 죄로 탄핵하였다. 당시에는 당색을 떠나서 대부분의 신료들이 척화론 입장이었고, 주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귀·최명길 등 소수에 불과하였다.
[내용 및 특징]
북인들의 탄핵에 의하면, 유성룡은 주화오국으로 종묘와 사직의 죄인이 되었으며, 이는 인륜(人倫)에 관계된 것[『선조실록』 32년 7월 4일]이고, 이로 인해 선비의 기상이 떨어지고 국세가 약해지게 만들어서 ‘군주를 잊고 나라를 저버린 망군부국(忘君負國)의 죄를 지었다’고 성토하였다[『선조실록』 32년 8월 1일]. 북인뿐만 아니라 같은 이황(李滉)의 문인이었던 조목(趙穆)도 유성룡을 주화오국이라고 지목하면서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유성룡은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에서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강화(講和)가 불가피했다고 변명하였다.
오달제 등은 인조가 충의(忠義)를 고취하면 군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울 것인데, ‘미친 오랑캐’를 두려워하여 ‘군부(君父)를 불의(不義)에 빠뜨린다’면서 ‘주화가 나라를 망친다’고 주장하였다[『인조실록』 14년 9월 23일]. 최명길은 이러한 척화파의 주장을 명분만을 숭상하는 풍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조목조목 따져서 이러한 풍토를 개혁하기 위한 관제(官制) 변통론(變通論)을 내놓았다.
[변천]
후대에 주화오국이라는 비판은 당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실학자 이익(李瀷)은 임진왜란 당시 강화론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나온 최명길의 개혁론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과 당색이 같은 이원익(李元翼)이 여기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주화오국이라는 주장은 주자학의 비현실성과 무책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현실에 입각하여 이것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조선후기의 실학이었다. 즉 주화론과 실학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