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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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中宗反正)

서지사항
항목명중종반정(中宗反正)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반정(反正)
분야정치
유형사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연산군을 축출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개설]
연산군은 1483년(성종 14)에 세자로 책봉되어 19세인 1494년 12월에 즉위하였다. 즉위 무렵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은 불과 7세였고 왕위 승계 절차로 볼 때 아무런 흠이 없었다. 연산군의 치세 동안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고, 성종 때에 마련된 법과 정치 운영이 마비되다시피 하였다. 연산군은 임사홍 등의 궁금(宮禁) 세력과 더불어 사치와 황음(荒淫)을 자행하면서 학정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악정(惡政) 하에서는 누구라도 반정(反正)의 거사를 촉발하면 성공할 수 있는 정황이었다.

전 이조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이 먼저 연산군의 폐출을 밀약하고,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을 끌어들였다. 이들을 삼대장(三大將)이라 통칭하였다. 그리고 군자감 부정 신윤무(辛允武), 군기시 첨정 박영문(朴永文), 형조 정랑 장정(張珽) 등이 군사를 동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거사에 성공하였다.

[역사적 배경]
중종반정은 1506년 9월에 발생하였다. 중종반정은 무엇보다 무오사화·갑자사화로 초래된 연산군대의 악정이 그 촉발 요인이었다. 박원종을 비롯한 연산군의 총신(寵臣)들이 반정을 주도했던 점으로 볼 때, 당시 신료들 내부에서는 악정을 초래한 군주는 언제라도 갈아 치울 수 있다는 암묵적 또는 공공연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신료가 주도하여 이루어진 중종반정은 이런 점에서도 이 시기에 이르러 군신 권력 관계가 새롭게 변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종반정 이후 왕이 바뀜에 따라 명나라와의 대외 관계에서 사위(辭位)·승습(承襲)에 관한 주문(奏文), 사신이 응대할 사목(事目)에 어떠한 내용을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와 달리 이때는 반정에 의해 왕이 교체되었다고 당당히 밝히지 않았다[『중종실록』 1년 9월 21일]. 또한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책봉을 보면 모든 과정을 삼대장이 주도하였으며, 또한 그 이전의 타 공신 수와 달리 117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공신에 책봉되었고, 대부분 연산군의 총신(寵臣)이었다. 과다하게 책봉된 정국공신은 이후 위훈삭제(僞勳削除) 문제의 소지를 낳으면서 기묘사화의 중요 원인이 되었다.

[발단]
중종반정에 앞선 2~3개월 전에 전라도에 유배되어 있던 유빈(柳濱)·이과(李顆)·김준손(金駿孫) 등이 거병(擧兵)을 계획하여 각처에 격문을 띄웠다[『중종실록』 1년 12월 1일]. 이것을 볼 때 당시 거사는 누가 먼저 주도하여 촉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의 삼대장은 예정을 앞당겨 반정을 일으켰다. 거사가 일어나던 날 밤에 박원종 등이 창덕궁을 향해 나아가자, 문무백관과 군민 등이 풍문을 듣고 다투어 달려와 가도를 꽉 메웠다는 점에서, 이 거사에 많은 군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연산군일기』 12년 9월 2일]. 비록 누가 주모자가 되어 거사하지 않더라도 당시 폐정(弊政)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조정 내외에 이심전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경과]
중종이 즉위하면서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유교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훈구계 공신이 주도하는 중종 초기에는 아직 연산군 때의 폐해가 근본적으로 시정되지 않았다. 1515년(중종 10)에 조광조가 등용되면서 신진기예의 사림이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대거 진출하였다.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의 언관직(言官職)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公論)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경연의 활성화, 소격서(昭格署) 폐지, 향약의 실시, 『소학(小學)』의 보급 등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언관권(言官權)이 확대되고 나아가 조광조 세력[趙光祖之勢]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이 주도하였던 정국공신의 위훈 삭제 문제를 계기로 훈구 세력이 대대적으로 반격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묘사화로 이어지며 사림은 크게 화를 입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돈, 『조선 전기 군신 권력 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김돈, 『조선 중기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9.
■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연산군·중종과 그 신하들』, 역사비평사, 2007.
■ 이병휴, 『조선 전기 기호 사림파 연구』, 일조각, 1984.
■ 이병휴, 『조선 전기 사림파의 현실 인식과 대응』, 일조각, 1999.
■ 최이돈, 『조선 중기 사림 정치 구조 연구』, 일조각, 1994.

■ [집필자] 김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