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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관(土官)

서지사항
항목명토관(土官)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동반직(東班職), 서반직(西班職), 지록(地祿), 체아직(遞兒職)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일부 지방에 설치되어 지역 주민들에게 주로 임명하던 특수 관직.

[개설]
토관(土官)은 고려말기에 원나라에서 되찾은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토착 세력에게 내린 특수 관직이다. 조선 초창기에는 평양, 화령 즉 영흥, 제주에만 있었으며, 동·서반(東·西班)의 구분 등 내부 정리에 힘썼다.

세종 때에 이르러 영토 확장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토관은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에 따라 조직 체계도 정비되어 과거부터 전해오던 제도를 탈피하고 조선에 맞게 확립되었다.

토관 설치의 목적도 새 개척지에 주민을 좀 더 빨리 거주시키는 것 등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토관은 여러 측면에서 활용될 수 있었다. 『경국대전』 편찬과 함께 운영 체계도 완비되면서 중앙 관직과의 관계도 정리되었다. 『속대전』 단계에서는 서반은 보이지 않고 동반만 보이고 있다.

[담당 직무]
1) 문·무반의 구분과 기능의 분화

양계(兩界)와 제주, 경주, 전주 등 일부 지역에만 설치된 지방 관직이었으나, 중앙 관직과 마찬가지로 문·무반으로 구분된 것이 특징이다. 토관의 설치 목적 가운데 지방 세력을 회유하고 포섭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중앙 관료로 나아가기 어려운 토착민들에게 대대로 살아온 땅에 머물면서 자신의 능력과 배경에 맞는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나라에 충성하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더구나 토관으로서 경력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중앙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었다. 비록 힘들고 좁은 길이었으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였다.

토관은 공식적으로 동반과 서반으로 구분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23일]. 자연히 그에 따라 역할과 기능도 나뉘었다. 동반은 그 지방의 행정 실무를 관장하였으며, 서반은 위령(衛領)의 벼슬을 맡았다. 중앙을 본보기로 하였으나 짜임새가 더해졌다.

토관이 모든 지역에 일시적으로 설치된 것은 아니다. 양계의 경우 4군 6진의 개척 등으로 영토가 넓어졌고, 명나라나 여진족 등과의 관계에 따라 전략적인 요충지가 달라짐으로써 설치 지역의 조직 편제 등에서 차이가 컸다. 일률적으로 정비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양계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영흥은 마땅히 일찍부터 동·서반으로 구분되었다. 그 뒤 세종 때 북방 개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6진을 필두로 여러 지역에 토관이 설치되었다. 이때 동반은 경원(慶源)·부령(富寧)·경성(鏡城)·강계(江界)에 설치되었다. 의주(義州)는 세조 때, 그리고 다른 지역에도 대체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 단계까지는 설치되었다.

서반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연변·길주·경원·경흥·의주·경성·함흥·강계·회령·온성 등은 세종 때 설치되었고, 문종 때에는 부령과 도절제사의 본영이 옮겨 간 뒤 없어졌던 경성에 다시 설치되었다[『문종실록』 1년 5월 28일].

한편 세조 때에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땅의 넓이와 인물의 수로 볼 때 다른 도의 배나 됨에도 불구하고 큰 고을에 토관이 설치되지 않은 게 문제라며, 경주·전주와 같이 본래 어향(御鄕)인 곳에다가 동·서반 5품 이하의 토관을 설치하였다[『세조실록』 3년 6월 29일]. 더불어 향리가 없고 사신이 왕래하는 도회지라는 이유로 개성에도 동·서반을 모두 설치하였다[『세조실록』 11년 11월 15일]. 하지만 개성 역시 고려왕조의 어향이라는 이유가 컸다. 실제로 이는 양성지(梁誠之)의 오경론(五京論)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세조실록』 2년 3월 28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없어졌다. 그리하여 토관은 양계와 제주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2) 조직의 구성과 부서의 역할

동·서반에 따라 기능이 분화되면서 좀 더 세분해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각각 관서를 두었다. 이 역시 중앙 관직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지역적 특성 때문에 전부 동일했던 것은 아니다.

동반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평양의 경우, 도부사(都府司)는 부(府)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군기서(軍器署)는 군기·융병·기계 관련 일을, 전빈서(典賓署)는 봉명사신의 음식을, 정설국(正設局)은 연향을, 전례국(典禮局)은 예악을 주관하고, 영작원(營作元)은 유악(帷幄)을 영조(營造)하고 시탄(柴炭)·거초(炬草)·포진(鋪陳)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제학원(諸學院)은 유학, 의학, 역학 제생(諸生) 공급과 원사(院舍)를 고치고 수리하는 일을, 전주서(典酒署)는 주온(酒醞) 등을 관장하였다.

인흥부(仁興部)는 동면(東面)의 일, 예안부(禮安部)는 남면(南面)의 일, 의흥부(義興部)는 서면(西面)의 일, 지안부(智安部)는 북면(北面)의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신평부(信平部)는 부내의 일, 사창서(司倉署)는 곳집과 전곡의 출납, 수지서(收支署)는 늠급의 출납, 장선서(掌膳署)는 관아의 음식 주는 일, 사옥서(司獄署)는 감옥 수리와 보수·죄수 구휼, 장루서(掌漏署)는 시간 아뢰는 일을 관장하였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이렇게 관서가 설치되어 각각 맡은 업무를 처리했는데, 지역의 특성상 내용은 차이가 있었다.

서반은 군사상 배치된 관직이므로 그 직임은 동일하였다. 다만 지역에 따라 벼슬 등급과 이름이 달랐다. 최종으로 정리된 것이 『경국대전』에 기재되었는데, 영흥은 진북위(鎭北衛), 평양은 진서위(鎭西衛), 영변은 진변위(鎭邊衛), 경성은 진봉위(鎭封衛), 의주는 진강위(鎭江衛), 회령·경원은 회원위(懷遠衛), 종성·경흥은 유원위(柔遠衛), 강계는 진포위(鎭浦衛)라 불렸다.

제주의 관호는 1404년(태종 4)에 개칭하여 동도천호소(東道千戶所)를 동도정해진(東道靜海鎭)으로, 서도천호소(西道千戶所)를 서도정해진(西道靜海鎭)으로 하고, 도천호를 도사수, 상천호를 상사수, 부천호를 부사수, 도지관을 도주관, 성주를 도주관좌도지관, 왕자를 도주관우도지관이라 불렀다[『태종실록』 4년 4월 21일].

3) 선발과 임용,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

문반인 동반은 관찰사가, 무반인 서반은 절도사가 본토인으로 추천하여 임용하였다. 그리고 임명장은 문·무관의 예를 따라 50일 안에 서경(署經)하도록 하였다[『단종실록』 즉위년 6월 1일]. 모두 체아직(遞兒職)으로 3년에 1차 수직하도록 되었다. 대개 지방군 조직의 고위 무인 출신인 천호·백호·진무, 향역(鄕役)을 마친 지인(知印)·영사(令史) 등을 서용하였다. 제주 역시 지방의 유력층으로 임명하였다. 때때로 상직(賞職)이나 전사자의 증직(贈職)으로 활용되었다.

근무한 대가로 녹을 받았는데, 토지를 지급하므로 지록(地祿)이라고 불렀다. 1407년(태종 7) 영흥의 사례를 통해 품계별로 지급하는 양이 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태종실록』 7년 9월 1일]. 한양의 관직으로 옮겨 가려면 1품을 내리게 하였다. 하지만 수령직 같은 요직으로 나가기는 힘들었다. 중앙관에게서 아전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세종실록』 25년 6월 10일].

[변천]
1) 초창기 설치 과정과 특징

토관은 고려말에 설치되었으며, 평양이 비교적 시기가 일렀으나 쌍성총관부를 되찾고 군현을 개편한 뒤에는 화령 즉, 영흥에도 생겼다. 태조 때에 들어오면서 제주도에도 설치된 사실이 확인된다. 아마 그 전부터, 즉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환수 이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원나라에서 영토를 되찾은 뒤에 효율적으로 통치하되, 특히 그 지방 세력을 회유하고 포섭하기 위해 운영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 밖의 다른 곳에는 없었으며, 세종 때 영토 확장에 나서기 전까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동·서반의 구분 등 내부 정리만 실시하였다.

2) 영토 확장에 따른 설치 지역의 확대와 조직 체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등으로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설치 지역이 크게 늘어났다. 함경도 방면은 1428년(세종 10)에 영흥 이후 처음으로 경원에 설치되었다. 이어 길주 등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두만강 유역에 6진 개척이 활발해지면서 설치 지역이 더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평안도의 경우에는 평양에 이어 1429년에 영변에 설치되었다. 설치 목적은 되찾은 영토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거주하도록 함으로써 거읍(巨邑)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1년 3월 26일]. 이는 앞 시기의 목적과 차이가 있다. 수복한 땅을 원활히 통치하기보다 그 땅에 백성들을 안착시키려는 목적이 더 컸다. 이어서 토관은 의주·강계로 확장되었는데, 4군 개척과 관련이 깊다.

토관 확대와 더불어 조직 정비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동반은 관서 정리는 물론이고, 품계도 중앙과 같이 비로소 정·종(正·從)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통의랑(通議郞) 등의 품계 이름도 확정되었다[『세종실록』 16년 4월 21일].

서반의 경우, 특기할 것은 중랑장 등과 같은 고려식 체제가 점차 사라지고 정5품 건충대위(建忠隊尉) 사직(司直) 등의 조선식 체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1436년 중앙 서반에 9품직이 가설되자 1439년에 토반(土班) 서반에도 9품 사용(司勇)이 설치되었다[『세종실록』 21년 4월 11일]. 이로써 확대에 따른 조직 체계가 정비되었다.

3) 운영 체제의 완비와 후기의 변화

『경국대전』 편찬과 더불어 토반의 운영 체제가 전반적으로 완비되었다. 중앙의 관직 체계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특유의 직명(職名)이 비로소 갖춰진 것이다. 또한 전반적으로 조직이 축소되고 관직이 감소하면서 정원도 줄었다. 임명되려면 반드시 서경을 거쳐야 했으므로 정예화되었다.

또한 토반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다만 전관(轉官), 승진, 근무 일수는 같았으나 6품 위로 승진하려면 중앙관의 2배를 근무해야 했다. 차별이 없지 않았으나 어느 정도 대등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속대전』 단계에서는 서반은 보이지 않고 동반만 남았다. 평안·함경도 토관직은 앞 회(回)의 임명장을 1명이 모두 들고 상경하여 이조에서 심사받은 후 새 임명장을 받아 오는데, 모두 봉하여 보내오면 관찰사와 절도사가 조사한 뒤 당사자를 불러 직접 전하였다. 또한 비록 퇴관할 차례가 되었어도 60세가 되어야 비로소 물러가게 했다. 이로써 변화의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이재룡, 『조선초기사회구조연구』, 일조각, 1984.
■ 김일환, 「조선초기 월과군기제하의 군기제조」, 『조선시대사학보』 16, 2001.
■ 노영수, 「토관직에 대한 연혁고」, 『겨레문화』 8, 1994.
■ 이상협, 「조선초기 북방사민과 토관제의 확대」, 『내일을 여는 역사』 21, 2005.
■ 이장희, 「조선초기 토반무직의 성격」, 『한국사론』 7, 국사편찬위원회, 1980.
■ 이재룡, 「조선 초기의 토관에 대하여」, 『진단학보』 29·30, 1966.
■ 吉田光男, 「15世紀朝鮮の土官制-李朝初期地方支配體制の一斷面-」,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981.

■ [집필자] 윤훈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