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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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評事)

서지사항
항목명평사(評事)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병마평사(兵馬評事), 북평사(北評事)
관련어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령관(首領官), 우후(虞侯),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兵營)에 설치되어 행정 업무나 문학 기풍 진작 등을 맡아보던 문신으로 임명된 서반 외관직.

[개설]
조선초기에 평안도와 함경도에 설치되었던 무반 외관직인데, 문신들이 임명되었다. 평사(評事)는 병마절도사 아래에 있으면서 군사 관련 일보다는 문부(文簿)를 관장하거나 군자금과 고과(考課) 등을 담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특성상 문신보다 수가 많았던 무신 출신의 병사나 변장(邊將), 수령 등을 견제하는 일도 수행했다.

임무가 막중한 만큼 지위가 높았으므로 문무를 겸한 사람을 임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후기에 이르러 지역 상황이 달라지면서 함경북도에만 1명 남기고 나머지는 없앴다. 직무에도 변화가 생겨 민정 쪽 일이 많아졌다.

[담당 직무]
병마평사(兵馬評事)의 약칭으로, 정6품 관직이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영에 소속되어 군사 조치에 참여하며, 문부를 관장하고, 군자(軍資)와 고과 등의 일을 맡았다.

아울러 군기 제작과 군사들의 군장(軍裝)을 점검하는 업무도 담당하였다. 무관직이었으나 문신이 임명되었다. 이는 권한이 막강했던 양계병마절도사(兩界兵馬節度使)와 그 휘하에 포진했던 첨절제사·만호·권관(權管) 등의 변장들과 상당수에 달하는 무신 수령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평사는 군사를 지휘하는 직책은 아니었으나 때때로 직접 군사를 통솔하며 방어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병마절도사가 군사(軍事) 등의 일로 자리를 비우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도내의 국방을 총괄하였다. 이로 인해 임무가 막중해지자 본 품계인 종6품보다 높은 품계의 사람을 임명하는 일이 많았으며, 4품의 관원을 보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 사정상 실제 전투에 참여할 수도 있어서 문무를 겸비한 문신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종 때에는 선비면서 장수인 유장(儒將) 후보자로 선발된 사람을 임명하도록 정해졌다.

진장(鎭將)들이 왕명으로 다른 지방에 출사(出使)할 때에는 군대를 동원하는 표지로 쓰던 나무패인 병부(兵符)를 항상 몸에 차고 있어야 하며, 사망이나 사고로 자리를 비울 때는 상관을 통해 병마절도사에게 반납해야 했다. 이때 병마절도사가 없으면 평사가 대신 처리하였다.

[변천]
평사는 양계병마절도사의 전신인 도절제사(都節制使) 휘하의 수령관(首領官)이었던 도사(都事)의 후신(後身)이었다. 수령관은 본디 임명되는 자의 품계에 따라 종4품의 경력(經歷) 또는 종5품의 도사로 구분되었으며, 도절제사 경력소(經歷所)를 관할하였다. 1466년(세조 12) 경력소를 혁파하고 정식으로 평사가 설치되면서 정6품관으로 규정하였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영안북도(永安北道: 현 함경북도)와 평안도에 각각 1명씩 두도록 규정하였으나, 1488년(성종 19)에는 영안남도에도 1명을 두도록 함으로써, 양계의 병마절도사들이 모두 평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녹봉을 지급하는 우대 조치를 베풀었다. 아울러 근무 일수가 720일이 되면 바뀌었다.

후기에 들어와 북방 지역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면서 함경북도에 1명만 남기고 다른 곳은 모두 혁파하였다. 이로 인해 북평사(北評事)로 불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근무한 지 1년이 되면 교체되었다. 또한 함경도관찰사와는 상피(相避)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만큼 군사 일보다 민정 쪽의 업무가 중요해졌다.

이로 인해 직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먼저 가뭄이나 홍수 등의 피해를 입은 전답의 세(稅)를 면해주는 재결(災結) 업무를 맡았다. 함경북도의 경우, 추첨으로 정해진 대상 지역을 호조에서 배당받아 다시 심사해서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식년문과(式年文科) 초시(初試)의 향시(鄕試)에는 몇 번 바뀐 끝에, 함경남도는 도사가, 함경북도는 평사가 시험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1712년(숙종 38)에 당시 북평사였던 홍치중(洪致中)이 청(淸)나라 사신 목극등(穆克登)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 경계를 정하는 일 등과 관련해서 간혹 외교 문제에도 간여하였다. 아울러 함경도의 대외 교역 시장이었던 개시장(開市場)을 열려고 할 때, 조관(朝官) 중에서 선발된 감시어사(監市御史)가 파견되어 감사·병사와 함께 장시와 관계된 사람들을 지휘하고 감독하도록 했다. 때로는 북평사가 감시어사를 겸임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민현구, 『조선초기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오종록, 「조선초기 병마절도사제의 성립과 운용」, 『 진단학보』 59·60, 1985.
■ 오종록, 「조선초기 양계의 군사제도와 국방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집필자] 윤훈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