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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리영 등에 소속된 군직, 또는 균역법 실시 이후 군포를 내는 군관층.
[개설]
조선후기의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리영 등의 군영에 소속된 군관들로 궁성 밖의 순라(巡邏) 등을 주요 임무로 하였다. 다만 모든 군영에 통일된 입속 방식이나 승진 절차 등은 마련되지 않았으며, 각각 자체의 규정에 따르도록 했다. 특히 총리영의 경우에는 정원과 업무가 다른 군영의 그것과 차이가 컸다.
한편 균역법 실시 이후에 군포를 새로 부담하게 된 군관층을 일시적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담당 직무]
군영 설치 초기에는 장신(將臣)들의 전령(傳令)이나 사환(使喚) 등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위영과 어영청에서는 궁성 밖의 순라가 중요 직무였다. 금위영의 경우 장교 1명과 군졸 5명이 초경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특별 순행하였는데, 별군관(別軍官)·별무사·별기위 중의 1명을 따로 정해 경군 1명을 거느리고 번갈아서 순찰, 감독하였다. 어영청은 별군관·교련관·별무사 가운데 1명을 따로 정하여 번갈아 전체를 순찰, 감독하였다.
정원은 훈련도감 10명으로, 호조에서 급료를 지급받았다. 한산(閑散)이 만 20개월 달하면 병조에 공문을 보내어 6품에 승급시키고, 장기 근무하면 세 군데 영을 차례로 돌며 근무하였다.
한편 소포 10순·편전 3순을 발사하여 40시 이상을 명중하면 평궁 1장을, 45시 이상 명중하면 쌀 1섬을 더 주며, 8시 미만을 명중하면 벌칙으로 번수를 3일 더하였다. 선발 시험은 유엽전·편전·기추를 각 1순씩으로 했다. 편추나 특별 과목도 자원하면 시험을 허가했다.
금위영은 처음 15명으로 정했다가 1704년(숙종 30)에 5명을 도제조군관(都提調軍官)으로 이속시켜 10명으로 정했다. 당상·당하를 막론하고 한산 가운데서 차출했다.
7품 이하는 24개월이면 병조에 조회(照會)하여 6품으로 승급시켰다. 출신자(出身者)와 한량(閑良) 가운데서 임명했다. 어영청도 10명으로, 한산으로 임용하는데 1728년(영조 4)에 설치하였다. 장기 근무하면 3영에 번갈아 근무하게 했다. 7품은 만 24개월이 되면 병조에 공문을 보내어 6품계로 승급시켰다. 수어청 별군관은 9명이었다.
[변천]
총리영의 별군관 정원은 100명으로, 다른 군영과 차이가 컸는데 이는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1793년(정조 17) 수원부사를 유수로 승격시켜 장용외사를 겸직시켰고, 1802년(순조 2) 장용영이 혁파된 후 총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승격 이후 1793년에 비변사의 건의로 별효사(別驍士)의 경우, 부(部)와 사(司)의 편제에 넣지 않았다. 무사들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에서 만든 제도인데, 200명 정원이 너무 많아서 절반으로 줄이고 별군관이라는 칭호를 붙여 좌·우열(左右列)로 만들어 유수에게 직속시켰다. 그리고 뒤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포가 1필로 줄었고, 그로 인한 부족액을 충당하기 위하여 양역 대상자가 아닌 한유층(閑遊層) 가운데 군관을 선발하여 군포를 부담시켰는데 그들을 별군관이라 하였다[『영조실록』 27년 2월 27일]. 하지만 그중에 양반도 포함되자 반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에 선무군관(選武軍官)으로 개칭하고 시험을 통하여 무관으로 발탁하여 승반(陞班)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대신 군포는 계속 부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