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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수군통어사(水軍統禦使)는 일명 ‘통어사(統御使)’ 혹은 ‘삼도통어사(三道統御使)’라 칭한다. 17세기에 조선은 방어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통제영(統制營)과 통어영(統禦營)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즉 서남 해안을 방비하기 위해 통제영을 개설하고, 경기(京畿) 방어를 목적으로 통어영을 설치하였다. 조선 정부는 통어영에 수군통어사를 파견하였다.
[담당 직무]
17세기 일본과 외교 관계가 안정된 반면, 중국 황당선이 서남해안에 출몰하여 수군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 특히 경기도 강화도 방어를 위해 경기수영(京畿水營)을 통어영으로 개편하였다. 통어영은 강화도 옆의 교동도(喬桐島: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수군통어사’ 또는 ‘삼도통어사’를 찾아보면, 가장 먼저 확인되는 기사가 1643년(인조 21)이다. 즉 “이완(李浣)을 경기수사(京畿水使) 겸 3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다.”라는 기록이다[『인조실록』 21년 5월 2일]. 17세기 수군통어사는 경기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1763년(영조 39)에 어영대장 김한구(金漢耈)가 이르기를, “경기수사가 교동도에 주둔하고 있어서 만약 영종도에 긴급한 상황이 발생해도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경기수군을 교동도와 영종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 방어사를 파견하였다. 즉 교동도가 황해도와 평안도로 연결되는 해로(海路)를 방비하고, 영종도가 충청도·전라도·경상도로 연결되는 뱃길을 방어하였다. 이때 경기유수가 삼도통어사를 겸하였다[『영조실록』 39년 11월 29일].
1789년(정조 13)에 삼도통어사를 경기도 교동도에 다시 배치하였다. 경기수군이 모두 강화도 방비에만 편중되어 있어서 삼남 지방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로 가는 뱃길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강화유수가 삼도통어사를 겸직하는 것을 혁파하고, 교동부사(喬桐府使)를 수군절도사로 임명하였다[『정조실록』 13년 5월 26일].
[변천]
17세기 경기도 교동도에 통어영을 설치하고 강화도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초창기 수군통어사는 경기수사가 겸직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어영대장 김한구가 강화도를 더 효율적으로 방비하기 위한 계책으로 경기좌·우도로 나누어 관방하는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때 강화유수가 삼도통어사를 겸하였다[『영조실록』 39년 11월 29일].
18세기 말엽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통어영을 강화도로 이속시킨 것은 옛사람들의 뜻에 크게 벗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삼도통어사를 경기도 교동도에 다시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