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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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鎭營)

서지사항
항목명진영(鎭營)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병영(兵營), 순영(巡營)
하위어속읍(屬邑)
관련어영장(營將), 진영장(鎭營將), 겸영장(兼營將),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진관(鎭管)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도입한 『기효신서』에 의해 창설된 군영으로, 조선전기의 거진(巨鎭)을 대신하여 조선후기 국방과 치안을 담당함.

[개설]
진영(鎭營)은 조선후기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설치되었다. 진영은 설치 지역이나 군병을 기준으로 볼 때, 병영이나 수영 등에 비해 그 수가 월등하게 많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방군의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영의 건물은 읍성 안이나 밖에 설치되었다. 군병은 최고 지휘관인 정3품 영장(營將)을 비롯하여 별장·천총·파총·초관·지구관·기고관·기패관 등의 장교와 마병·보군 등의 병졸로 구성되었다.

진영의 재정은 영장·군관·노(奴)·말 등의 급료와 말먹이로 사용되는 미(米)·태(太) 84섬을 비롯하여 반찬값과 ‘종이·붓·먹’의 구입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는데, 재원은 소속 읍중 진영이 자리 잡고 있는 읍이 대부분을 감당하였다.

진영은 평소에는 지방군의 훈련과 점검을 주관하고 유사시에는 외국군의 침략을 격퇴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더불어 1665년(현종 6)부터 토포영(討捕營)을 겸하여 치안 기능도 수행하였다.

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 진영은,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 개혁을 시행하는 가운데 설립되었다.

즉 조선 정부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명나라 병서(兵書)인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조총수인 포수(砲手)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였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었다. 더불어 무관 영장을 영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전쟁 경험이나 무예에 재주가 없는 수령이 군사 지휘관을 겸임함으로써 비롯되는 문제점을 개선하려 하였다.

실제로 『징비록』을 통해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 좌영인 경기도 용진(用津), 우영인 수원 독성산성, 전영인 용인 석성산성, 후영인 파주산성 등에 진영이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후기 진영의 조직과 역할을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증보문헌비고』 기록을 통해, 영장이 1명 이상 파견된 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 지역 진영의 조직에 대해 속읍과 군병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충청도 5, 경상도 6, 전라도 5, 강원도 3 등 19곳에 진영이 설치되었는데, 경기도 8, 황해도 6, 평안도 9, 함경도 6 등 29곳을 포함하면 전국에 설치된 진영은 총 48개임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충청도 해미진영, 경상도 김해진영, 전라도 여산진영과 운봉진영을 제외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삼남의 진영과 강원도 삼척진영에는 영장이 파견되어, 거읍(巨邑) 수령을 대신하여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아울러 경상도 안동진영은 속읍이 15개로 가장 많았고, 강원도 삼척진영은 월송포 또한 속읍이라는 점에서 육군과 수군이 통합된 진영임을 알 수 있다.

진영의 군병 중 ‘마병, 속오군, 표하군’은 4개 도에 공통으로 설치되었고, 전라도와 경상도 진영에는 당보군이나 수솔군, 강원도 삼척진영에는 단속수군이 별도로 배치되었다. 아울러 충청도 청주진영의 경우,『여지도서』에서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초관 33명, 지구관 1명, 기고관 1명, 기패관 58명, 마병 714명, 보군 3,667명’이, 『호서읍지』에서 ‘토포군관(討捕軍官) 90명, 봉수별장 8명, 봉수감관 40명, 봉수군 800명’이 확인된다.

둘째로 진영의 건물과 재정에 관하여 살펴보자. 우선 진영의 건물로는 충청도의 경우 공주·청주·충주진영은 읍성 밖에, 해미·홍주진영은 읍성 안에 지어졌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해미·홍주진영은 갑작스러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읍성 안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진영 건물의 규모는 충주진영의 경우 ‘동헌 21칸, 군뇌청 12칸, 폐문루 8칸, 내아 8칸, 장청 7칸, 영리청 7칸, 집사청 5칸, 삼문칸 4칸, 수직방 4칸, 교사청 4칸, 책방 3칸, 급창방 3칸’이었다.

진영의 재정은 영장이 파견된 경우 영장·군관·노(奴)·말 등의 급료와 말먹이로 사용되는 미(米)·태(太) 84섬을 비롯하여 반찬값과 ‘종이·붓·먹’의 구입비용 등으로 지출되었는데, 재원은 소속 읍 가운데 진영이 자리 잡고 있는 읍이 대부분을 감당하였다.

반면 1664년부터 수령이 영장을 겸임했던 해미진영은 소재지인 해미현에서 수미(收米) ‘19섬 4말 8되’와 매달 말먹이로 태 12말과 조 1섬 6말을 제공받았지만, 청주진영과 달리 찬가미(饌價米), 세육(稅肉) 등의 지출은 없었다. 따라서 영장이 파견된 청주진영에 비해 수령이 영장을 겸임한 해미진영의 재정 지출이 훨씬 적었다.

셋째, 진영은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였다. 먼저 국방과 관련하여, 유사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삼남의 진영은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시키고, 경기도 진영은 총융청과 수어청에 편성되어 도성 외곽을 방어하며, 평안도와 함경도 진영은 북방 민족의 남하를 막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실제로 인조대에는 후금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정묘호란[『인조실록』 5년 4월 20일] 뒤부터 병자호란까지 전국의 진영에 영장을 파견하여 지방군의 훈련과 점검을 강화하였고, 북벌론이 제기된 효종 때인 1654년(효종 5)부터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삼남 진영에만 영장을 파견하였다.

더욱이 진영은 육군이지만 바다도 방어하였다. ‘강원도 삼척진영은 울릉도를, 진무영 소속 경기도 부평·통진·풍덕진영과 황해도 연안진영은 강화도를, 충청도 해미진영은 19세기에 외국 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충청도 바다를[『고종실록』 3년 2월 18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진영의 치안 기능은 1665년 삼남의 영장이 토포사를 겸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진영은 토포영으로서 ‘도둑,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자, 천주교도, 민란·변란의 주모자와 적극 가담자’ 등을 체포하였다.

한편 1810~1859년 충청도 진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수재(水災)가 심각할 경우 진영은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멈추고 군병들을 둑을 쌓는 데에 참여시킴으로써 대민지원(對民支援)도 담당하였다.

[변천]
임진왜란 중에 설치된 진영은 영장(營將)의 파견 여부와 관련하여 몇 차례 변화하다가, 1654년(효종 5) 이후 삼남 지역에는 대부분 영장을 파견하고 그 밖의 지역은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는 형태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삼남 지역의 진영과 강원도 삼척진영에 파견된 영장은, 영장을 겸임하였던 수령을 대신하여 속읍의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둘째, 진영 설치 지역이나 소속 처가 바뀐 경우로, 전라도 여산진영은 현종대 익산군에서, 충청도 해미토포영은 1712년 온양군에서, 강원도 춘천진영은 영조대 철원부에서 되돌아왔다. 아울러 ‘충청도 청주·충주진영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 공주·홍주진영은 강화도에[『효종실록』 2년 6월 3일], 충청도 해미진영은 1684년부터 1687년까지 진무영의 별중영에’ 편성되었다가 환원되었다.

반면 ‘전라도 남원진영은 숙종대에 운봉현으로, 평안도 영유진영은 같은 숙종대에 숙천부로, 강원도 원주진영은 영조대에 횡성현으로’ 옮겨갔다.

셋째로 진영의 속읍 소속 처와 수가 바뀐 경우로, 1652년 충청도 해미진영이 창설되자 홍주진영 12개 속읍이 해미진영으로 이속된 반면, 공주진영 3개 속읍이 홍주진영으로 옮겨와 속읍 수가 19개에서 10개로 축소되었다. 아울러 숙종대에 해미진영 속읍이었던 서산군과 태안군이 안흥진으로, 1703년 청주진영 속읍이었던 옥천군이 공주진영으로 이속되었다. 그 밖에 1651년(효종 2) 충청병영이 청주로 옮겨진 뒤 충청도좌영이었던 청주진영은 중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진영은 1895년(고종 32) 병영·수영 등과 더불어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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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여지도서(輿地圖書)』
■ 『호서읍지(湖西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징비록(懲毖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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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서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