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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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巡營)

서지사항
항목명순영(巡營)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병조(兵曹)
하위어거진(巨鎭), 제진(諸鎭), 진영(鎭營), 병영(兵營), 수영(水營), 방어영(防禦營)
관련어순찰사(巡察使), 순영중군(巡營中軍), 관찰영(觀察營), 관찰사(觀察使), 감영(監營), 감사(監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방어사(防禦使), 영장(營將)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겸임한 순찰사의 군영.

[개설]
1555년(명종 10) 을묘왜란(乙卯倭亂) 후 순찰사 파견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 등 장수를 감독할 수 있는 순찰사를 겸임시켰다. 그런 가운데 관찰사 혹은 감사의 군영인 관찰영, 즉 감영을 순영(巡營)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순영의 최고 지휘관은 순찰사이고 휘하에 정3품 순영중군(巡營中軍) 1명 등을 두었다. 특히 순영중군은 순찰사를 겸한 관찰사를 군사적으로 보좌하기 위해 설치되었는데, 처음에는 관찰사가 순영중군을 뽑다가 1604년(선조 37) 함경도부터 중앙에서 파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순영은 국방은 물론이고 치안도 담당하였다. 즉 전라도순영의 군병이 임진왜란의 행주산성 전투에서, 그리고 전라도·충청도·경상도순영의 군병이 용인 전투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아울러 순영중군은 광해군대 속오군의 조련을 담당하였고, 강원도순영중군은 1760년(영조 36)부터 토포사를 겸임하여 도적 체포 등을 수행하였다.

순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555년 을묘왜란 때 중앙에서 파견한 순찰사가 제때에 전쟁터에 도착하지 못하고, 군졸은 적은 반면 장수가 많아 명령이 일치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정부는 외적이 침입하여도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순찰사와 방어사를 파견하지 않고, 관찰사에게 순찰사를 겸임시켜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통제하면서 전체 군병의 지휘를 총괄하게 하였다[『명종실록』 10년 10월 18일]. 이처럼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임하게 되면서, 관찰사의 군영인 관찰영을 ‘순찰사의 영’이라는 뜻으로 순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순영에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종2품 순찰사와 정3품 순영중군을 비롯하여 각종 군병이 설치되었다. 충청도의 경우, ‘순찰사 1명, 순영중군 1명,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백총 3명, 초관 39명, 지구관 4명, 기패관 102명, 별군관 200명, 수첩군관 1,000명, 별무사 360명, 마병 2초, 속오군 19초, 친아병 20초, 표하군 634명’ 등이 배치되었다.

순영은 국방은 물론이고 치안도 담당하였다. 즉 임진왜란의 용인 전투에서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충청도·경상도순영의 군병이[『선조실록』 26년 4월 24일], 그리고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순찰사 권율이 지휘한 전라도순영의 군병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월 11일 전체 조선군 168,400여 명의 약 20.2%인 34,000명이 관찰사 겸임의 순찰사 휘하에 배치되었다는 점 등에서도 임진왜란에서 순영의 군사적 역할이나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순영중군은 함경도의 경우, 1604년(선조 37)부터 중앙에서 낙점하여 파견하였고, 광해군대에는 거읍(巨邑)의 수령이 영장(營將)을 겸임하면서 속오군의 훈련을 주관하였으며,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지 않은 강원도에서는 1760년(영조 36)부터 토포사를 겸임하여 토포군관 30명 등과 함께 도적 체포 등 치안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순영중군은 순영에서 국방과 치안의 핵심 역할을 하였는데, 순영중군의 영인 중영(中營)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한편 17세기 실학자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은 병마절도사가 조련을 주관하므로 감영중군은 하는 일이 없고, 『경국대전』에 없던 중군을 그 당시에 둔 것은 감사와 병사가 도내의 군병을 분할하여 통솔하기 때문이나 그것은 『경국대전』의 본의가 아니므로 중군을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다만 별도로 파견된 병마절도사 없이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하는 감영의 경우에는 중군을 그대로 두자고 하였다.

[변천]
순영은 1555년(명종 10) 을묘왜란 후 설치되었다. 함경도의 경우, 1604년(선조 37)부터 관찰사를 군사적으로 보좌하는 순영중군을 관찰사가 마음대로 뽑지 않고 중앙에서 낙점하여 파견하였다. 아울러 강원도순영은 1760년(영조 36)부터 순영중군이 토포사를 겸임하고, 토포군관 30명도 설치되면서, 강원도 치안 유지의 핵심 구실을 하였다.

순영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속대전(續大典)』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관동지(關東誌)』
■ 『반계수록(磻溪隨錄)』
■ 이태진 외, 『한국군제사-근세조선전기편-』, 육군본부, 1968.
■ 이형석, 『임진전란사』상, 신현실사, 1974.
■ 서태원, 「임진왜란 후 지방군 지휘체계의 개편-영장·순영중군의 설치와 관련하여-」, 『인문학연구』12, 2009.서태원, 「임진왜란에서의 지방군 지휘체계」, 『실학사상연구』19·20, 2001.
■ 서태원, 「조선전기 유사시 지방군의 지휘체계-중앙군사지휘관의 파견과 관련하여-」, 『사학연구』63, 2001.

■ [집필자] 서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