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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교련병대는 1881년(고종 18)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군대로서, 개항 후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한 개화정책의 하나로 세워졌다. 그러나 교련병대에 대한 우대가 상대적으로 기존 군대의 불만을 고조시켜 결국 구식 군대가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때 일본인 교관 등이 살해되고 군사제도는 예전 체제로 환원되면서 교련병대 또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교련병대는 개항 후 추진된 개화정책의 하나로 출현하였다. 1880년 12월 외세의 침략과 대내외 정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아래 12관서[司]를 두어 분야별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12관서 가운데 군무사(軍務司)를 설치하였으며, 그 아래 교련국(敎鍊局)을 두어 교련병대를 창설하였다.
교련병대는 고종 때 설치된 신식 군대 별기군(別技軍)의 다른 명칭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별기군이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소속된 특수 훈련군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고종실록』과 『일성록』 등 관찬 사서에 ‘교련병대’로 적혀 있으므로, 그간 통용되어 왔던 ‘별기군’이라는 용어 대신 ‘교련병대’로 지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교련병대’는 또한 1883년에 개화파인 박영효(朴泳孝)가 광주(廣州) 남한산성에서 양성한 신식 군대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어느 경우이건 교련병대는 개화정책의 하나로 양성된 신식 군대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일본식 근대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직 및 역할]
교련병대의 조직은 통리기무아문군무사 아래 교련국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처음 출범할 때는 80명의 병사를 선발하였다. 1년 뒤인 1882년에는 사관생도 140명과 병졸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교련병대 편성체제는 다음과 같다.
[변천]
교련병대는 5군영의 지원자 중에서 신체 건강한 자 80명을 선발하고, 1881년 4월 12일부터 무위소(武衛所)별선군관(別選軍官)인 윤웅렬(尹雄烈)과 김노완(金魯莞)의 통솔 아래 일본공사관의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에게 훈련을 받았다. 1881년 8월에는 고종을 모시고 춘당대(春塘臺)에서 시험 훈련을 실시하였다[『고종실록』 18년 8월 27일].
그러나 이들에게 지급한 높은 급료와 초록 군복, 그리고 상부의 편애 등이 상대적으로 기존 군영 소속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에 성난 기존 군대 군사들이 1882년 6월 임오군란을 일으켜 교련병대를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와 외무성 순사 등이 살해되었고, 옛 군제가 회복되면서 교련병대는 폐지되었다.
1883년 설치된 남한산성 교련병대는 광주유수 박영효가 양성한 군대로, 임오군란 후 민씨(閔氏) 일파의 뜻대로 조선의 군사제도가 청나라식으로 전면 재편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개화파들의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이며, 고종의 뜻도 반영되어 있었다. 이때 박영효가 양성한 교련병대는 500여 명에 달했으며, 일본 육군도야마학교[陸軍戶山學校]에서 교육받은 신복모(申福模) 등에게서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박영효가 1883년 10월 광주부유수를 그만두자 어영청에 배치되었다가 친군전영(親軍前營)에 흡수되었다[『고종실록』 20년 10월 1일]. 이로써 고종과 개화파의 뜻으로 설치되었던 광주부의 교련병대 양성은 민씨 일파의 정치적 견제에 밀려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남한산성 교련병대 출신 전영 군인의 상당수가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