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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장위영은 1888년 4월 친군(親軍) 5영체제를 3영체제로 개편할 때 전영(前營)과 좌영(左營)을 통합한 체제로 출범했다. 신설된 장위영의 병력은 2,666명에 달하여 전에 비해 대폭 증강되었다. 그러나 전투력과 군비의 근대화와는 거리가 있었으며, 기존 친군영 체제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왕 호위와 궁궐 및 도성 방어를 담당했던 장위영은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군제(軍制)는 청의 영향 아래 친군 전영(前營)·후영(後營)·좌영(左營)·우영(右營)의 4영체제로 재편되었다. 이후 1884년(고종 21) 11월 7일 금위영과 어영청 소속으로 4영에 분속되었던 군사들을 합하여 친군별영(親軍別營)을 창설했으며, 이로써 조선 군제는 친군 5영체제로 확대되었다.
1888년(고종 25) 4월 19일 고종은 영의정 심순택(沈舜澤)과 판부사 김홍집(金弘集)을 불러 “각 영이 분치(分置)되어 쓸데없는 비용이 많이 들고, 매 영 500명의 병사는 조련하는 규모에도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군제를 3영으로 변통할 뜻을 밝혔다[『고종실록』 25년 4월 19일].
이어 “우영과 후영·해방영(海防營)을 합하여 통위영(統衛營)으로, 전영과 좌영을 합하여 장위영으로, 별영은 총어영(總禦營)으로 칭하도록 하라.”고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통위사(統衛使)에 우영사·후영사·해방사를 겸임한 민영익(閔泳翊)을, 장위사(壯衛使)에 전영사인 한규설을, 총어사(總禦使)에 별영사 이종건(李宗健)을 지명했다. 이때 통위영은 중영(中營)으로 삼아 황색 깃발을, 장위영은 좌영으로 삼아 청색 깃발을, 총어영은 우영으로 삼아 백색 깃발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로써 중앙군은 친군 3영체제로 개편되었으며,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장위영 또한 새롭게 출범하였다.
[조직 및 역할]
장위영 조직은 총 2,66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간부 및 사무직은 도제조(都提調) 1명, 영사(營使) 1명, 병방(兵房)·군사마(軍司馬)·문안(文案)·정령관(正領官)·부영관(副領官)·참영관(參領官)·초관(哨官)·참군(參軍) 등 241명이며, 병정은 1,680명이고, 지원 요원은 치중병(輜重兵) 150명, 비전병(非戰兵) 170명, 공병(工兵) 25명 등 745명이었다. 장위영의 조직도는 그림과 같다.
장위영은 왕을 호위하고 도성 순찰과 방어, 그리고 금송(禁松)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고종이 능(陵)에 행차할 때 호위를 담당했고, 1894년(고종 31) 헌인릉을 참배하러 갈 때는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치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고종실록』 31년 2월 13일].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전주성이 함락되자, 4월 2일 장위영 정령관(正領官) 홍계훈(洪啓薰)이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가 되어 장위영 군사 5대(隊)를 거느리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다.
전주성에 도착한 홍계훈은 포격을 하면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5월 7일 동학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수용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5월 하순 철수하였다.
[변천]
장위영은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1894년 12월 공문서에 ‘전장위영(前壯衛營)’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폐지된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