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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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도(長水道)

서지사항
항목명장수도(長水道)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청통역(淸通驛), 영천신역(永川新驛), 아화역(阿火驛), 모량역(毛良驛), 사리역(沙里驛), 경역(鏡驛), 조역(朝驛), 인비역(仁庇驛), 의곡역(義谷驛), 육역(六驛), 압량역(押梁驛), 흥해신역(興海新驛), 대송역(大松驛), 송라역(松羅驛), 장기신역(長鬐新驛), 하양신역(河陽新驛), 장수역(長水驛), 청경역(淸景驛), 우곡역(牛谷驛), 화양역(華陽驛), 잉보역(仍甫驛), 구어역(仇於驛), 노곡역(奴谷驛), 산역(山驛), 부평역(富平驛), 청경역(淸鏡驛)
관련어유곡도(幽谷道), 역도(驛道), 속역(屬驛), 찰방(察訪), 역승(驛丞)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경상도 신녕의 장수역(長水驛)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

[개설]
장수도(長水道)는 세종대에 설치된 역도(驛道)로, 1457년(세조 3)에는 유곡도(幽谷道)를 흡수·통합하였다가 1462년(세조 8)에 다시 분리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의 운영 실태는 알 수 없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경상도역지(慶尙道驛誌)』 등을 통해 조선시대 후기의 상황은 파악할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장수도는 사근도(沙斤道)·안기도(安奇道)·유곡도((幽谷道)·김천도(金泉道)·성현도(省峴道)·황산도(黃山道)·소촌도(召村道)·자여도(自如道)·송라도(松羅道)·창락도(昌樂道)와 함께 경상도 지역에 설치된 역도이다. 신녕-영천-경주-울산으로 이어지는 역로(驛路)와, 경주에서 자인(慈仁) 방면, 청도(淸道)·청송(靑松)·청하(淸河) 방면으로 연결되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변천]
고려의 역도를 계승한 조선 왕조가 언제부터 역도를 개혁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태조실록』에 따르면, 1396년(태조 5) 7월에 고려시대의 5도양계(五道兩界)를 개편하면서 서북면의 군현을 개정하고, 1398년(태조 7)에는 동북 지방의 역을 정비, 신설하면서 함경도 지역의 역도를 개편하였다. 그 뒤 1423년(세종 5) 7월에는 경상도 지역에 황산도(黃山道)와 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고 역승(驛丞)을 파견하여 경상도의 역도를 개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세종대에는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역도 체제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장수도에는 청통역(淸通驛)·영천신역(永川新驛)·아화역(阿火驛)·모량역(毛良驛)·사리역(沙里驛)·경역(鏡驛)·조역(朝驛)·인비역(仁庇驛)·의곡역(義谷驛)·육역(六驛)·압량역(押梁驛)·흥해신역(興海新驛)·대송역(大松驛)·송라역(松羅驛)·장기신역(長鬐新驛)·하양신역(河陽新驛) 등 16개의 속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뒤 세조 연간인 1457년에는 유곡도와 장수도를 통합하여 장수도라 하였다. 1462년(세조 8)에 역제를 개편할 때는 장수역·청통역·청경역(淸景驛)·우곡역(牛谷驛)·화양역(華陽驛)·압량역·모량역·아화역·의곡역·경역·잉보역(仍甫驛)·사리역·조역·구어역(仇於驛)·노곡역(奴谷驛)·인비역 등 16개 역이 장수도의 속역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경우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우곡역·화양역·산역(山驛)·청통역·청경역(淸鏡驛)·아화역·모량역·의곡역·사리역·조역·구어역·경역·인비역·부평역(富平驛) 등 14개 역이 장수도의 속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장수도의 속역은 청통역(靑通驛)·아화역·모량역·사리역·압량역·우곡역·부평역·청경역(淸景驛)·구어역·화양역·의곡역·인비역·경역·조역 등이었다. 산역을 장수도에 배치하고, 압량역은 성현도로 옮긴 것이 확인된다. 대동여지도에 장수도 속역을 표시하면 <그림>과 같다.

한편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장수도에는 역리(驛吏) 348명, 역노(驛奴) 292명, 역비(驛婢) 165명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역마는 157필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통계에는 3개의 속역이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역속과 역마가 배속되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순조 연간의 문헌인 『만기요람』에는, 장수도에 3등마 787필과 아전 및 군졸 18,793명이 배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2년(고종 9)에 편찬된 『경상도역지』에는 역마의 수가 137필로 나타나 있어 그 차이가 매우 크다. 『경상도역지』에 기록된 장수도 속역의 공수위전(公須位田) 지급 실태와,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장수도역지(長水道驛誌)』에 기록된 장수도 소속 역마의 수는 <표 2>와 같다. 장수도의 속역은 모두 소로(小路)에 속하였으므로, <표 1>에 보이듯이 공수전은 5결씩 모두 75결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총 68결 13부밖에 지급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실제로는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장수도는 1896년(고종 33) 1월 18일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경상도역지(慶尙道驛誌)』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유선호, 「朝鮮初期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 [집필자] 조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