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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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천도(魚川道)

서지사항
항목명어천도(魚川道)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소고역(所古驛), 개평역(開平驛), 장동역(長洞驛), 평전역(平田驛), 가막역(加莫驛), 입석역(立石驛), 성간역(城干驛), 종포역(從浦驛), 만포역(滿浦驛), 북동역(北洞驛), 앙토역(央土驛), 고리역(古理驛), 우장역(牛場驛), 고연역(古延驛), 벽단역(碧團驛), 창주역(昌州驛), 대삭역(大朔驛), 소삭역(小朔驛), 방산역(方山驛), 초천역(草川驛), 추여역(秋餘驛), 적유역(狄踰驛)
관련어역도(驛道), 속역(屬驛), 마호관군(馬戶館軍), 차역관군(差役館軍), 마위전(馬位田), 복호전(復戶田), 입마가(立馬價)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평안도 영변의 어천역(魚川驛)을 중심으로 설치한 역도.

[개설]
어천도(魚川道)는 대동도(大同道)와 더불어 평안도에 속한 역도(驛道)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사행을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방 야인의 침입을 막아 내는 군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어천도에는 소고(所古)·개평(開平)·장동(長洞)·평전(平田)·가막(加莫)·입석(立石)·성간(城干)·종포(從浦)·만포(滿浦)·북동(北洞)·앙토(央土)·고리(古理)·우장(牛場)·고연(古延)·벽단(碧團)·창주(昌州)·대삭(大朔)·소삭(小朔)·방산(方山)·초천(草川)·추여(秋餘)·적유(狄踰) 등 22개의 속역이 있었다. 영변을 중심으로 희천-강계-만포에 이르는 역로를 비롯해 영변-개천, 영변-운산-초산-위원, 영변-태천-귀성-삭주-창성-벽동 등지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관서역지(關西驛誌)』에 따르면 어천도에는 331명의 마호관군(馬戶館軍)과 153명의 차역관군(差役館軍), 169명의 여군(餘軍) 등 총 653명의 관군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마호관군에게는 마위전(馬位田)과 복호전(復戶田)을 지급해 여기서 얻은 비용으로 입마가(立馬價)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변천]
고려의 역도를 계승한 조선 왕조가 언제부터 역도를 개혁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1413년(태종 13)에 부분적인 개편에 나서서, 경기도의 마산도(馬山道)를 청파도(靑坡道), 금곡도(金谷道)를 중림도(重林道), 풍해도구참(豊海道九站)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로 개편하고 청교도(靑郊道)를 증설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평구도(平丘道)를 복치하였다. 그 뒤 1423년(세종 5)에는 경상도에 황산도(黃山道)와 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6진 개척을 계기로 태조 이후 신설한 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역도-속역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런데 1462년(세조 8)의 역제 개편을 통해 설치된 대부분의 역도와 달리 어천도는 그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세조실록』에 "함길도·평안도의 찰방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세종실록』 「지리지」의 관로찰방(館路察訪)이 『경국대전』 간행 이전까지 유지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 어천도는 대동도와 더불어 평안도의 역도로 설치되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어천도의 각 참(站)은 군호가 관리하였으며[『성종실록』 15년 5월 21일], 『중종실록』에 따르면 어천도의 속역은 모두 강가 각 진(鎭)의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중종실록』 23년 2월 28일]. 이는 야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종대에 여역(癘疫)이 발생한 뒤 어천도의 관군(館軍)은 대부분 유망(流亡)하였으며, 역마도 충분하지 못해 대동도의 말을 빌려 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의정 정광필은 이러한 상황에 이른 원인을 야인의 출몰과 어천도의 역마 대부분이 지쳐서 죽었다는 점에서 찾았다[『중종실록』 23년 3월 7일]. 이로 미루어 이 시기 야인의 출몰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점마사(點馬使)가 역마를 점열(點閱)한 뒤, 군정(軍情)에 관한 소식이 긴급한 역에는 도내 목장의 말을 우선적으로 분급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23년 2월 28일]. 그러나 도내에 목장이 많지 않아 말의 수가 원래 적은데다 야인의 출몰 등으로 인해 과반이나 감소되어 있어서 이 조치가 실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 때문인지 1530년(중종 30)에는 겸찰방(兼察訪)이 설치되었다.

한편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어천도에는 개평(開平)·수영(隨營)·소길리(所吉里)·초천(草川)·입관(入館)·장동(長洞)·적유(狄踰)·입석(立石)·성간(城干)·종포(從浦)·상하북동(上下北洞)·앙토리(央土里)·고리산(古理山)·우장(牛場)·고연주(古延州)·입관(入館)·창주(昌州)·대삭주(大朔州)·구주(龜州) 등 19개 속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역마는 3등마 301필, 아전과 군졸은 4,351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어천도는 1896년(고종 33) 1월 18일,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만기요람(萬機要覽)』
■ 『관서역지(關西驛誌)』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유선호, 「朝鮮初期의 驛路와 直路」, 『역사교육』70, 1999.

■ [집필자] 조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