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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황해도의 도로망인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황해도 장연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전기 세종 때 전국의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한 데 이어 세조 때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신행역(新行驛)은 청단도(靑丹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신행역의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장연현 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지역에 신행역과 금동역(金洞驛)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전국적으로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청단역(靑丹驛)·금곡역(金谷驛)·심동역(深洞驛) 등과 함께 황해도의 역도 중 하나인 청단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장연현 편에 따르면, 신행역에는 역마 2필과 역리 4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해서읍지(海西邑誌)』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변천]
세종 연간에 전국적인 역로 조직이 마련되었으나, 세조대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까닭에 두루 순시하기가 어려워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폐단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과 역승(驛丞)을 두게 하였다. 신행역은 이때 청단역·금곡역·남산역(南山驛) 등과 함께 청단도찰방 관할이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청단도에 속한 역으로 존속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행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 따르면, 장연현 남쪽 10리 지점인 추화방에 있었다. 그에 비해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장연현 동쪽 5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장연현 남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