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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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도(輸城道)

서지사항
항목명수성도(輸城道)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주촌역(朱村驛), 수성역(輸城驛), 안녕역(安寧驛), 종경역(鍾慶驛), 무령역(撫寧驛), 마유역(馬乳驛), 강양역(江陽驛), 무산역(茂山驛)
관련어역도(驛道), 고산도(高山道), 동기도(東岐道), 시리도(施利道), 사리(司吏), 참리(站吏), 역리(驛吏)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함경도 지방의 경성·부령·회령·종성·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설치된 역을 관할한 역도.

[개설]
수성도(輸城道)는 조선시대의 41역도(驛道) 중 하나로, 함경도 경성의 주촌역(朱村驛)에서 부령의 수성역(輸城驛)을 지나 회령의 안녕역(安寧驛), 종성의 종경역(鍾慶驛), 온성의 무령역(撫寧驛), 경원의 마유역(馬乳驛)·강양역(江陽驛)을 잇는 역로와, 부령에서 무산의 무산역(茂山驛)을 연결하는 교통로 등을 관할하였다. 수성도는 동북면의 역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몽고식 참명(站名)을 개편함으로써 홍원에서 경원까지의 역참을 정비하였다.

그 뒤 1421년(세종 3)에는 단천의 기원역(碁原驛)시리역(施利驛) 사이의 마운령(磨雲嶺) 아래에 곡구참(谷口站)을 신설하였고, 1435년(세종 17)에는 6진을 개척하면서 경원의 마유참(馬乳站), 경성의 무안참(撫安站)·농교참(農郊站)·역산참(櫟山站)을 새로 설치하였다. 1440년(세종 20)에는 함길도의 역도를 고산도(高山道)·거산도(居山道)·수성도로 재편하였는데, 이때 경성부 명원참(明原站)에서 경원 마유참에 이르는 18개 역참을 묶어 수성도로 편성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역제 개편을 거쳐 함길도의 역도가 고산도(高山道)·동기도(東岐道)·시리도(施利道)로 재편됨에 따라 수성도는 폐지되고 그 속역은 시리도에 통합되었다. 그 뒤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 이르러 다시 역도가 거산도(居山道)·고산도·수성도로 바뀌면서 독립되었다. 이때 수성도에는 수성역·강양역·주촌역·종경역·마유역·오촌역(吾村驛)·요참(要站)·석보역(石堡驛)·회수역(懹綏驛)·영안역(寧安驛)·풍산역(豊山驛)·역산역(櫟山驛)·무안역(撫安驛)·녹야역(鹿野驛)·무령역(撫寧驛)·덕명역(德明驛)·연기역(燕基驛)·아산역(阿山驛)·무웅역(雄撫驛) 등 19개 역이 소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수성도는 1398년(태조 7)에 동북면 지역의 몽고식 역참을 개편하여 홍원에서 경원까지 역참을 정비한 이후 1440년(세종 20)에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안변의 고산참(高山站)에서 함흥의 덕산참(德山站)까지를 고산도, 홍원의 신은참(新恩站)에서 길주 고참(古站)까지를 거산도, 경성 명원참에서 경원 마유참까지를 수성도로 개편함에 따라 성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함경도 지역인 동계(東界) 지역에 도원도와 삭방도라는 역도가 편성되어 개성의 산예역(狻猊驛)에서 함흥의 선덕역(宣德驛)까지만 역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동북면 지방을 개척하고 6진을 설치하면서 이 지역의 교통 수요가 증가하자 역참을 신설하고 역로를 재편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에 따라 1398년에 정도전을 동북면에 파견하여 군현을 정비하면서, 몽고식 참명을 <표1>과 같이 개편하고 역참을 신설하여 홍원에서 경원까지 역로를 확대하였다.


그 뒤 1409년(태종 9)에 단천의 마곡역을 신설하고, 이듬해에는 경원의 시원참·웅구참·강양참을 회수역으로 통합하였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길주의 영동역을 신설하였다.

세종대에 들어와서는 6진을 개척하면서 함경도의 역도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고산도역승이 관할하는 고산역에서 덕산역까지의 거리가 582리이고 시리도역승이 관할하는 신은역에서 회수역까지가 650리로 너무 멀어서, 고산역에서 청산역까지를 고산도, 시리역에서 회수역까지를 회수도, 주천역에서 거산역까지 주천도로 개편하였다. 그와 더불어 단천의 기원역과 시리역 사이에 곡구참을 신설하였다. 이어 1435년(세종 17)에는 경원의 마유참과 경성의 무안참·농교참·역산참 등을 새로 설치하였다. 6진 개척이 거의 마무리된 1440년(세종 22) 2월에는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변의 고산참에서 함흥의 덕산참까지를 고산도, 홍원의 신은참에서 길주의 고참까지를 거산도, 경성의 명원참에서 경원의 마유참까지를 수성도라 하여 역도 조직을 개편하고, 찰방의 주관 아래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후 거산도·고산도·수성도의 3도 찰방 체제는 1445년(세종 27) 3월에 다시 고산도·화원도·거산도·명원도·연기도의 5도 역승 체제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12월에 고산도·거산도·명원도·풍산도의 4도 역승 체제로 개편되었다.

함경도의 역도는 그 뒤 또다시 변화를 겪어 결국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산도·동기도·시리도로 재편되었는데, 이때 수성도의 속역은 시리도로 이속되었다. 이때 시리도 속역은 곡구(谷口)·기원(碁原)·마곡(磨谷)·하오(河吾)·상가사(尙家舍)·영동(嶺東)·임명(臨溟)·웅평(雄平)·약수(藥水)·명원(明原)·주촌(朱村)·오촌(吾村)·수성(輸城)·회수(懷綏) 역 등이었다.

성종대의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함경도의 역도가 다시 고산도·거산도·수성도로 바뀌었으며, 수성도는 수성·오촌(吾村)·주촌(朱村)·요참(要站)·석보(石堡)·회수(懹綏)·영안(寧安)·풍산(豊山)·역산(櫟山)·종경(鍾慶)·무안(撫安)·녹야(鹿野)·무령(撫寧)·덕명(德明)·마유(馬乳)·연기(燕基)·아산(阿山)·강양(江陽)·무웅(雄撫) 등 19개 속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수성도 및 그 속역은 무산의 읍참(邑站), 마전역(麻田驛), 풍산역(豊山驛) 등이 신설된 것을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 후기까지 유지되었는데, 다음 <표3>에서 보이듯이 『여지도서(輿地圖書)』와 『대동지지(大東地志)』 및 『북관읍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거산도·고산도·수성도의 3도 찰방 체제는 1445년(세종 27)에 고산도(高山道)·화원도(和原道)·거산도(居山道)·명원도(明原道)·연기도(燕基道)의 5도 역승 체제로 바뀌어 수성참(輸城站)은 명원도(明原道)에 속하게 되고, 1446년(세종 28)에 다시 고산도(高山道)·거산도(居山道)·명원도(明原道)·풍산도(豊山道)의 4도 역승 체제로 개편되었다.

수성도 및 속역은 조선후기까지 존속되면서 야인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과 지방 사이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진상품 등 공공물자를 운송하였으며 왕래인의 규찰과 역마를 입대시키는 업무를 맡았다. 특히 수성도에서는 수성역에 성첩을 쌓고, 역리와 역졸 등을 군사 조직에 편성하는 이른바 이노작대(吏奴作隊)를 시행하여 외적을 방어하는 부방역(赴防役)도 부담하였다.

수성도 및 그 속역은 무산의 읍참(邑站), 마전역(麻田驛), 풍산역(豊山驛)의 신설을 제외하고는 조선후기까지 큰 변화없이 존속되었으며, 갑오개혁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의 역참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진상품 등 공공 물자를 운송하였으며, 왕래인의 규찰과 역마를 입대시키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뿐 아니라 국경과 가까운 지역의 경우, 외국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담당하였으며, 역리와 역졸 등으로 부대를 편성하게 한 이노작대법(吏奴作隊法)에 따라 군사 조직을 편성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부방역(赴防役)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1398년 고려의 동북면 지방을 영흥도와 길주도로 개편하고 경성에 참(站)을 설치하면서 다양한 역속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수성도에는 사리(司吏) 2명, 일수양반(日守兩班) 5명, 관부(館夫) 5명, 급주인(急走人) 5명, 마부(馬夫) 15명을 배치했다. 이후 함경도 지방의 사리는 신은참의 역리가 참리(站吏)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참리로 개칭된 듯한데,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등에 따르면 역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함길도 지방에서는 사리(司吏)·참리(站吏)·역리(驛吏)의 명칭이 서로 혼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관읍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수성도 속역의 역속과 역마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2>와 같다. 수성도에 속한 26개 속역에는 역리 9,914명, 역노는 1,076명, 역비 731명과 역마 290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특히 부령의 회수역, 회령의 역산역, 온성의 덕명역 등에는 1,000명 이상의 역리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실제로 입역한 것이 아니라 일부는 납공역리로서 신공전을 납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북관읍지(北關邑誌)』
■ 『관북역사례(關北驛事例)』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집필자] 조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