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생초역(省草驛)

서지사항
항목명생초역(省草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김천도(金泉道)
관련어속역(屬驛), 사근도(沙近道), 역승(驛丞),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전장(傳掌), 급주(急走), 산거(散居), 마위전(馬位田), 급주위전(急走位田), 거창군(居昌郡)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경상도의 도로망인 김천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조선 세종 때 역을 매개로 한 교통로인 역로(驛路)를 44역도(驛道)-537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생초역(省草驛)은 처음에는 사근도(沙近道) 관할이 되었다. 그 뒤 세조 때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되면서는 김천도(金泉道)로 편입되었고, 이후 김천도 찰방(察訪)의 관할 역의 하나로 확립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생초역은 조선 세종대에 전국의 역로망이 44역도-527속역 체제로 정비될 때, 사근도 역승(驛丞)이 관할하는 15개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거창 편에 따르면, 성초역에는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4필 등 총 6필의 역마와, 역리(驛吏) 151명, 역노(驛奴) 53명, 역비(驛婢) 51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에 따르면, 역마를 기르는 데 필요한 경비로 쓸 곡식을 마련하던 마위전답(馬位田畓)은 31결(結)이었다. 또한 역리의 정원은 27명이었는데, 입역 실태에 따라 구분하면 전장(傳掌)이 4명, 급주(急走)가 5명, 산거(散居)가 18명이었다. 그 중 급주에게는 급주위전(急走位田) 1결 50부가 지급되었다.

[변천]
1462년(세조 8)에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驛站)을 파하고 찰방과 역승을 두어 역로를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하였다. 성초역은 이때 김양역(金陽驛)·근보역(勤寶驛)·무촌역(茂村驛)·성기역(星奇驛)·팔진역(八鎭驛) 등과 함께 사근도에서 김천도로 편입되어, 김천도찰방이 관할하는 21개 역 중의 하나로 확립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조선후기까지 김천도에 소속된 역으로 존속하였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성초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에는 거창 북쪽 54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거창군 서북쪽 54리 지점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쪽 성기역에서는 30리, 남쪽 무촌역에서는 35리, 북쪽 지례 두곡역(豆谷驛)에서는 30리 떨어져 있었다. 오늘날의 위치는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 용초마을로, 조선시대에는 봉산리 일대를 성초 역리(驛里)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거창 지역에는 성초역 외에도 무촌역과 성기역이 있었다.

한편, 1728년(영조 4)에는 정희량(鄭希亮)이 이인좌(李麟佐) 등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켜 한때 안음·거창·합천 등 여러 고을을 제압하였다. 이때 윤동교(尹東郊)는 각지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아 반군의 토벌에 힘썼는데, 성초역까지 추격해 그곳에서 반군을 대파하기도 하였다. 윤동교는 그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집필자] 이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