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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강원도의 도로망인 은계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 위치함.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을 매개로 한 교통로인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때 생창역(生昌驛)은 도원도(桃源道)에 속한 김화(金化)에 있었는데, 그 당시 이름은 도창(桃昌)이었다. 조선시대는 세종 때 44역도-537속역 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생창역으로 바뀌었다. 그 뒤 세조 때 역제(驛制)를 다시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은계도(銀溪道)를 구성하는 역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존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생창역은 고려시대부터 강원도 김화 지역에 설치되었다. 그 당시 이름은 도창이었으며, 도원도에 속한 21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도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424년(세종 6)에 양주(楊州)와 회양(淮陽) 사이의 일부 역을 합속(合屬)하는 과정에서 도창역(都昌驛)과 생안역(生安驛)을 합쳐 생창역이 신설되었다. 이 당시 강원도에는 보안도(保安道)·대창도(大昌道)·평릉도(平陵道) 등의 도로망이 있었는데, 생창역은 은계역(銀溪驛)·신안역(新安驛)을 포함한 18개 역과 함께 기존 도로망에는 포함되지 않은 역이었다. 생창역은 함길도의 변경 소식을 치보(馳報)하는 데 이용된 대로(大路) 중 하나에 위치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김화 편에 따르면, 생창역에는 상등마(上等馬) 5필, 중등마(中等馬) 4필, 복마(卜馬) 11필 등 총 20필의 역마가 배정되어 있었으며, 역노(驛奴)는 210명, 역비(驛婢)는 147명이었다. 한편 『관동지(關東誌)』에는 서자(書者) 7명, 마두(馬頭) 7명, 마호(馬戶) 20명, 봉족(奉足) 20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1462년(세조 8)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각 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해 찰방(察訪)과 역승(驛丞)을 두는 과정에서 은계도가 신설되었고, 생창역은 은계도찰방이 관할하는 17개 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성종 때는 생창역을 비롯해 은계역·신안역·풍전역(豐田驛)·직목역(直木驛)·창도역(昌道驛) 등 강원도의 6개 역이 매우 쇠퇴하고 궁핍하므로, 군관이 내왕할 때 사용할 양료(糧料), 즉 식량을 군자미두(軍資米豆)로 공급하기로 하였다[『성종실록』 4년 11월 1일]. 생창역은 그 뒤 조선후기까지 유지되었으나,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생창역의 위치는 『여지도서』·『관동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모두 김화현 남쪽 4리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이다.
한편 정온(鄭蘊)의 『동계집(桐溪集)』, 허적(許積)의 『수색집(水色集)』, 신익전(申翊全)의 『동강유집(東江遺集)』,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집(老稼齋集)』, 채팽윤(蔡彭胤)의 『희암집(希菴集)』, 이풍익(李豊翼)의 『동유첩(東遊帖)』 등 조선시대의 문집에는 생창역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