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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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역(盤乳驛)

서지사항
항목명반유역(盤乳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중림도(重林道)
관련어동화도(同化道), 마위전(馬位田), 마위답(馬位畓), 금천현(衿川縣), 역도(驛道), 속역(屬驛), 찰방(察訪), 역승(驛丞)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중림도에 속한 역.

[개설]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부터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기존의 역로를 개편하였는데, 반유역(盤乳驛)은 그 과정에서 금천현에 신설되어 중림도(重林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세종 연간인 1434년(세종 16)에는 동화도(同化道)로 이속되었다가 다시 중림도에 소속되었다. 그 뒤 세조 연간인 1460년에는 경기좌도에 소속되어 경기좌도정역찰방의 지휘를 받았다. 성종대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다시 중림도로 이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반유역은 고려시대의 역도와 속역이 기록되어 있는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에 비해 『세종실록』에는 1434년에 병조의 건의에 따라 중림도에 소속된 반유역과 석곡역(石谷驛)을 동화도로 이속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세종실록』 16년 12월 1일]. 따라서 반유역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 1434년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신설 초기에 중림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기 금천현 조를 살펴보면, 당시 반유역에는 10호(戶)가 역촌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상등마 1필, 중등마 4필, 하등마 2필 등 총 7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역의 재정에 충당하도록 하기 위해 지급된 역전(驛田)으로는 마위전(馬位田)과 마위답(馬位畓)이 있었다. 마위전은 12결(結) 11부(負) 7속(束)이었는데, 그 가운데 실제로 농사를 짓는 밭[實結]은 6결 88부 3속, 묵은 밭은 5결 23부 4속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마위답은 29결 88부 5속이었으며, 그 중 실제로 농사를 짓는 논은 14결 77부 8속, 묵은 논은 15결 10부 7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 세종대 반유역은 신설 초기부터 중림도에 소속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이후 1434년(세종 16) 경기 지역 역로(驛路)의 폐단을 구제할 목적으로 충청도 찰방도인 중림도의 소속인 석곡역과 함께 동화도(同化道)의 속역으로 이속되었다.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 조치로 모든 역도에 찰방이 파견되면서 역도의 단위가 넓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중림도(重林道)·동화도(同化道) 관할하에 있는 모든 역들은 경기충청우도정역찰방(京畿忠淸右道程驛察訪)에 소속되었다. 이후 1460년(세조 6)에는 역로가 멀어 순시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인마(人馬)가 괴롭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역의 원근을 고려해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도를 개편하였는데, 이때 반유역은 경기좌도찰방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그 뒤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역도 체제에서는 반유역은 다시 중림도로 이속되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중림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고려·조선초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집필자] 홍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