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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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웅역(夢熊驛)

서지사항
항목명몽웅역(夢熊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금정도(金井道)
관련어충청주도(忠淸州道), 정해현(貞海縣), 이인도(利仁道), 해미현(海美縣),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사행로(使行路), 역도(驛道), 역승(驛丞), 찰방(察訪), 속역(屬驛)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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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금정도에 속한 역.

[개설]
몽웅역(夢熊驛)은 고려시대에는 충청주도(忠淸州道)에 소속된 34개 속역 가운데 하나로, 정해현(貞海縣)에 위치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대에 이인도(利仁道)에 소속되었으며, 세조대에는 금정도(金井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충청도 해미현(海美縣)에 위치하였으며,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양광도의 역도인 충청주도에 소속되었다. 그런데 몽웅역은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 때 한씨(韓氏) 성을 지닌 몽웅역의 역리(驛吏)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대광(大匡)의 벼슬을 받았다는, 『고려사』 「지리지」 청주목 홍주 조의 기록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해미 조에 따르면, 당시 몽웅역에는 역리 57명, 역노(驛奴) 39명, 역비(驛婢) 2명과 대마 2필, 중마 4필, 하마 5필 등 총 11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몽웅역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행로로 이용되었다. 이는 "정해현은 몽웅역에 속하여, 왕래하는 사객(使客)을 맞이하고 보내는 데 가장 긴요한 곳"[『태종실록』 7년 9월 5일]이라는 『태종실록』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변천]
조선시대 초기인 1407년(태종 7)에는 몽웅역이 위치해 있던 정해현과 여미현(餘美縣)을 병합하여 해미현이라 하였다. 그에 따라 몽웅역의 소속 행정 구역은 해미현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태종 이후부터 점진적으로 전국의 역로가 재조직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몽웅역은 금정도의 속역으로 편입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충청도].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역로가 쇠퇴하는 등의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1462년(세조 8)에 대대적으로 역로 개편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몽웅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금정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뒤이어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확정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도 별다른 변화 없이 금정도에 소속되었다. 몽웅역은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여지도서』 충청도 해미 조에 따르면, 몽웅역은 해미현 서쪽 9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집필자] 홍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