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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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월역(丹月驛)

서지사항
항목명단월역(丹月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연원도(連原道)
관련어광주도(慶州道), 역노(驛奴), 역비(驛婢), 역도(驛道), 속역(屬驛), 역승(驛丞), 찰방(察訪)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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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충청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연원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단월역(丹月驛)은 고려시대인 1061년(고려 문종 15)~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전국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광주도(慶州道)에 소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세조 연간에 시행된 여러 차례의 역도 재편을 거쳐, 최종적으로 충청도 지역의 역도인 연원도(連原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충청도와 경기도 광주를 연결하는 광주도의 속역으로 양광도 괴주(槐州) 지역에 위치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문종에서 인종 연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단월역에는 역노(驛奴) 110명, 역비(驛婢) 89명과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7필, 복마(卜馬) 5필 등 총 14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1460년(세조 6)에는 단월역에서 양재역(良才驛)에 이르는 도로가 평탄하여, 수레를 이용해 잡물(雜物)을 수송하는 운송로로 사용되었다[『세조실록』 6년 1월 23일]. 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는 신립(申砬)이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단월역에 진을 치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등 군사적인 용도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부터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기존의 역로(驛路)를 개편했는데, 단월역은 그 과정에서 충청도 지역의 역도인 연원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1433년(세종 15)에는 충주와 가깝다는 이유로, 소속 행정 구역이 괴산에서 충주로 변경되었다[『세종실록』 15년 7월 10일].

세조 연간인 1460년(세조 6)에는 역로가 멀어서 순시하기가 어렵고, 이동 거리가 길어 역마와 역민이 고통을 받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여 병조에서 역로 개편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연원도의 속역이던 단월역은 황강도(黃江道)의 일부 속역과 더불어 율봉도(栗峯道)에 소속되어 경기충청우도 찰방(察訪)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뒤이어 1462년(세조 8)에는 역로의 규모 및 역과 역 사이의 거리를 감안하여 역로를 재정비하였는데, 이때 단월역은 다시 연원도에 소속되어 연원도 찰방의 통제를 받았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그 뒤 성종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반포되면서 확정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도 기존과 같이 연원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단월역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충청북도 충주시 단월동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5, 2008.

■ [집필자] 홍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