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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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평역(洛平驛)

서지사항
항목명낙평역(洛平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유곡도(幽谷道)
관련어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역도(驛道), 속역(屬驛), 역승(驛丞), 찰방(察訪), 상주목(尙州牧), 용산역(龍山驛), 상평역(常平驛)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유곡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낙평역(洛平驛)은 조선 세조대 전국의 역로 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에 상주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경상도 지역의 역도(驛道)유곡도(幽谷道)의 속역으로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낙평역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세조 때 경상도 지역의 역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경상도 지역의 역도와 속역 내역에는 그 명칭이 보이지 않지만, 세조 연간인 1457년(세조 3), 1459년(세조 5), 1462년(세조 8)에 각각 역로 개편과 관련된 기사에 낙평역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상주목 조에 따르면, 당시 낙평역에는 역리(驛吏) 42명, 역노(驛奴) 47명, 역비(驛婢) 20명과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3필 등 총 5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1457년 4월에 경상도관찰사가 상주의 용산역(龍山驛)을 낙평역에 통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병조에서 각 역의 거리가 균평(均平)하지 못하다는 점을 들어 반대함에 따라 낙평역과 용산역의 통합은 무산되었다[『세조실록』 3년 4월 28일]. 1458년 낙평역의 사객(使客) 내왕이 잦고 물건의 운반이 끊이지 않아 역이 점점 피폐해진다는 병조의 건의에 따라 용산역과 상평역(常平驛)을 낙평역에 통합하였다[『세조실록』 5년 7월 28일].

1462년(세조 8)에는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역이 많고 길이 멀어 역로가 조잔(凋殘)해지고 찰방이 순시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에 따라 역로를 개편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낙평역은 유곡도에 소속되어 유곡도찰방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도 낙평역은 유곡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청하리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집필자] 홍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