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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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역(金泉驛)

서지사항
항목명김천역(金泉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김천도(金泉道)
관련어속역(屬驛), 전관급주(傳關急走), 경산부도(京山府道),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아전(衙前), 통인(通人), 장교(將校), 추풍령(秋風嶺)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경상도의 역도 중 하나인 김천도에 소속된 역.

[개설]
김천역(金泉驛)은 고려시대의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에서는 경산부도(京山府道)의 속역으로 경산부(京山府) 금산현(金山縣)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역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김천도(金泉道)로 개편되어 김천도의 속역으로 금산군 김천면(金泉面)에 설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행정 구역상의 김천군 김천면에 있었다고 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김천역은 추풍령 아래에 위치하여, 대구 감영, 진주 우병영, 통영 등 충청도와 경상도를 통과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역리 231명, 역노(驛奴) 60명, 역비(驛婢) 30명과 대마 2필, 중마 2필, 소마 10필 등 총 14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에는 역리 358명, 역노 51명, 역비 18명, 아전 15명, 통인(通人) 4명, 장교 3명, 총장교(銃將校) 10명 등으로 역민의 수가 증가하였다. 특히 역리는 358명 중에서 전장(傳長) 담당 40명, 사역(使役) 담당 57명과 다른 읍에 산거(散居)하는 261명으로 편성되어, 역역(驛役)이 분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른바 입역(立役) 역리와 납공(納貢) 역리로 나뉘어 역역을 부담한 것이다. 역노 역시 앙역(仰役)하는 23명과 전관급주(傳關急走) 28명으로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다.

한편, 김천역에는 찰방이 집무를 보는 동헌(東軒) 12칸을 비롯해 장행랑(長行廊) 10칸, 진창고(賑倉庫) 12칸, 창사(倉舍) 3칸, 죽정(竹亭) 6칸, 영빈루(迎賓樓) 6칸, 폐문루(閉門樓) 6칸, 관청(官廳) 6칸, 제리청(諸吏廳) 10칸, 형리청(刑吏廳) 4칸, 양마청(養馬廳) 5칸 등의 역사(驛舍)가 건립되어 역무에 이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김천역에는 청도기(淸道旗) 1쌍, 영기(令旗) 1쌍, 신기(神旗) 1쌍, 총 10자루, 장포창(長蒲槍) 30개, 화약 25근, 철환(鐵丸) 1두, 화승(火繩) 30파, 호적(胡笛) 1쌍, 대고(大鼓) 1좌, 쟁금(錚金) 1좌 등의 군기도 보관하고 있었다.

김천역은 동쪽의 개령 부상역, 남쪽의 지례 작내역, 서쪽의 금산의 추풍역, 북쪽의 문산역과 연결되어,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에 경산부도에 속했던 김천역은 조선시대에는 김천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경상도 김천 지역의 중심 역으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다가,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 『김천도역지(金泉道驛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조병로, 「조선후기 김천도형지안을 통해 본 역민의 구성과 직역」, 『경주사학』22, 2003.

■ [집필자] 조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