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금교역(金郊驛)

서지사항
항목명금교역(金郊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금교도(金郊道)
동의어금교참(金郊站)
관련어속역(屬驛), 역리(驛吏), 통인(通人), 사령(使令), 역노(驛奴), 역비(驛婢),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만수원(萬壽院), 보산역(寶山驛)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황해도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금교도에 속한 역.

[개설]
금교역(金郊驛)은 고려시대에는 금교도(金郊道)에 속한 역참이었으며, 강음현(江陰縣) 오조천(吾助川)에 위치해 있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금천(金川)으로 이설되었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직로상의 평산에서 황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조선초기에는 왕이 평주(平州) 지역의 온천을 찾거나 사냥을 할 때, 혹은 해주 등지에서 강무(講武)를 행할 때 이용한 주요 역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전송하는 곳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금교역은 고려시대부터 금교도 소속의 본역으로 설치되어 강음현 오조천에 위치하였다. 조선초기에 금천으로 옮겼으며, 세종대에 황해도 참로찰방의 금교참(金郊站)으로 개편되어 흥의(興義)·금암(金巖)·보산(寶山)·안성(安城)·용천(龍泉)·검수(劍水)·절령(岊嶺)·동선(洞仙)·경천(敬天) 등과 함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10개 참으로 되어 있다. 이후 성종대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시에는 황해도 7참이 금교도(金郊道), 기린도(麒麟道), 청단도(靑丹道)로 분화되어, 금교참은 금교도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금교역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금교역은 금교도의 본역으로 찰방이 파견되어 역정(驛政)을 감독하고 역속(驛屬)을 통솔하였다. 조선전기의 조직 구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역속으로 역리(驛吏) 48명, 통인(通人) 12명, 사령(使令) 20명, 역노(驛奴) 84명, 역비(驛婢) 15명이 배치되어 실무를 담당하였고, 역마는 11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1871년(고종 8)에 간행된 『황해도읍지(黃海道邑誌)』 평산 역원 조에 따르면 찰방 1명, 역리 49명, 통인 15명, 사령 20명, 역노 84명, 역비 15명과 역마 12필이 배정되어 있었다.

금교역의 역사 건물에 관해서는 1843년(헌종 9)에 간행된 『금교도체등중기책(金郊驛遞等重記冊)』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아사(衙舍) 7칸, 내행랑(內行廊) 3칸, 내중문(內中門) 1칸, 현도관(玄都觀) 3칸, 덕류당(德流堂) 10칸, 통인청(通引廳) 8칸, 사령방(使令房) 5칸, 외대문(外大門) 좌우 6칸, 중대문(中大門) 좌우 1칸, 관청대문(官廳大門) 1칸, 외삼문(外三門) 좌우 1칸, 통인마직방(通引馬直房) 3칸, 마구(馬廐) 2칸, 보역고(補役庫) 1칸, 진휼고(賑恤庫) 4칸, 관청방(官廳房) 4칸, 공방고(工房庫) 1칸, 창방(倉房) 4칸, 천자고(天字庫) 3칸, 지자고(地字庫) 2칸, 칙수고(勅需庫) 5칸, 청뢰정(淸籟亭) 2칸과 용담정(溶淡亭) 등의 건물이 역무에 이용되었다.

[변천]
금교역은 고려시대의 금교도에 소속되어 강음현 오조천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금천으로 옮겨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금교참이라 했다.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금교역이라고 하였다. 한편, 조선후기에 작성된 『여지도서』 황해도 금천 역원 조에 따르면, 금교역이 평산의 보산면 만수원(萬壽院)으로 이설되어 보산역(寶山驛)이라 하였다. 같은 책 평산 역원 조에도 "보산역은 부의 북쪽 20리 보산면에 있는데 지금의 금교역이다."라고 하여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황해도읍지』 평산 역원 조에서는 “금교역은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의 북쪽 20리 보산면에 있는데, 옛 보산역이 이것이다.”라고 하여 보산역이 다시 금교역으로 바뀌어 평산에 다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초기에 금천에 설치된 금교역은 평산으로 이설되어 보산역으로 개칭되었다가 1871년경에 다시 금교역으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해동지도(海東地圖)』
■ 『동여도(東輿圖)』
■ 『황해도읍지(黃海道邑誌)』
■ 『금교역체등중기책(金郊驛遞等重記冊)』
■ 조병로, 『한국근세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조병로, 「조선후기의 驛誌분석-關西驛誌를 중심으로-」, 『동국사학』18, 1984.

■ [집필자] 조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