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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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역(高山驛)

서지사항
항목명고산역(高山驛)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고산도(高山道)
관련어속역(屬驛), 삭방도(朔方道), 역도(驛道), 역승(驛丞), 찰방(察訪), 역리(驛吏), 역노(驛奴), 역비(驛婢)
분야경제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함경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고산도에 속한 역.

[개설]
고산역(高山驛)은 고려시대 22개 역도 중 하나인 삭방도(朔方道)에 속한 역으로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고산도(高山道)에 속하였다. 세조대에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되면서 찰방이 파견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산역은 고려시대에 함경도 안변에 설치되었으나, 그 설치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고산역이 『조선왕조실록』에 최초로 언급된 것이 1421년(세종 3)의 일로, 함길도 도관찰사 신상(申商)이 "고산역승(高山驛丞)의 관할하는 곳이 고산에서 덕산(德山)까지 거리가 582리이고, 시리역승(施利驛丞)의 관할하는 곳이 신은(新恩)에서 회유(懷綏)까지 거리가 650리이니, 이 두 역승의 관할하는 곳이 너무 멀어 순찰하기가 어렵다. 고산에서 청산(靑山)까지의 21개 역(驛)은 고산도(高山道)로 하고, 시리(施利)에서 회유(懷綏)까지의 12개 역은 회유도(懷綏道)로 하고, 주천(酒泉)에서 거산(居山)까지의 21개 역은 주천도(酒泉道)로 하여, 주천도의 역승을 새로 더 설치하게 해달라."[『세종실록』 3년 6월 2일]고 요청하는 기사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고산역은 지속되고 있음이 확인되며, 고산역을 중심으로 고산도가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연산군일기』에는 "함흥과 안변의 관아에서 진상하는 물품을 운반하는 고산 역민의 노역이 매우 심하여 (…) 역로가 날이 갈수록 피폐하게 되었다."[『연산군일기』 6년 1월 26일]고 기록돼 있다. 또 『인조실록』에 따르면, 고산역에는 원래부터 역리(驛吏)가 없어서 각 관청의 공천(公賤)을 역리로 삼고 그 소생을 역안(驛案)에 기재함에 따라 양천의 구별이 사라졌다고 한다[『인조실록』 26년 8월 13일].

1757년(영조 33)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고산역은 안변부 관아에서 남쪽으로 75리 거리에 있었다. 상등마 2필, 중등마 5필, 하등마 14필 등 총 21필의 역마와 역리 274명, 역노(驛奴) 675명, 역비(驛婢) 386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또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관북역지(關北驛誌)』를 살펴보면, 유리(由吏) 1명, 집리(執吏) 1명, 예리(禮吏) 1명, 병리(兵吏) 2명, 공리(工吏) 1명, 형리(刑吏) 1명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천]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2년(세종 14)에 안변부(安邊府)의 고산역부터 홍원현(洪原縣)의 평보역(平甫驛)까지를 한 구간으로 정하고 찰방을 파견하였다[『세종실록』 14년 4월 15일]. 1446년(세종 28)에는 안변의 고산역에서 함흥(咸興)의 덕산동(德山洞)까지를 고산도로 삼았다. 그런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된 고산도의 속역에는 고산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세조대에는 다른 명칭으로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후기인 1908년(순종 1)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고산역의 찰방은 교양관(敎養官)을 겸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여지도서(輿地圖書)』
■ 『관북역지(關北驛誌)』
■ 조병로, 『韓國近世 驛制史硏究』,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高麗前期 驛制의 整備와 22驛道」,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조선초기 역로망의 전국적 재편」, 『조선시대사학보』46, 2008.

■ [집필자] 조성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