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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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릉(弘陵)

서지사항
항목명홍릉(弘陵)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능원(陵園)
관련어명릉(明陵), 서오릉(西五陵), 서종제(徐宗悌), 익릉(翼陵)
분야왕실
유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능.

[개설]
홍릉은 도성 북쪽의 길지로 널리 알려진,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과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능인 익릉(翼陵) 곁에 마련되었다. 당초에 영조는 자신의 사후를 염두에 두고 혈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 놓도록 했지만, 실제로는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와 함께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원릉(元陵)에 안장되었다. 그에 따라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지금도 빈 채로 남아 있다. 홍릉의 석물이나 정자각 등은 왕실의 장례 절차를 간소하게 하라는 영조의 명에 따라 이전에 비해 검소하게 조성되었다.

[조성 경위]
정성왕후는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704년(숙종 30)에 13세의 나이로 연잉군(延礽君)과 혼인하였다. 숙종과 숙빈최씨(淑嬪崔氏) 사이에서 태어난 연잉군은 이때 두 살 아래인 11세였다. 그 뒤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이 되었으며, 1724년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두 사람은 50년 이상을 해로하였으나, 1757년(영조 33) 2월 15일에 왕비가 66세의 나이로 먼저 승하하였다. 이에 엿새 뒤인 2월 21일에 시호를 정성(貞聖), 능호를 홍릉이라 하였다.

영조는 왕비의 죽음을 애통해했으며, 친히 왕비의 행장을 지었다[『영조실록』 33년 3월 12일]. 산릉 터는 명릉과 익릉 곁의 을좌신향(乙坐辛向) 즉 서향으로 정하였다. 산릉 공역이 시작되자 영조는 친히 명을 내려 혈 자리 조금 왼쪽에 치우치게 해서 왕비의 무덤을 마련하도록 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그 오른쪽에 묻히려는 의도였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영조는 자신의 혈 자리에 십자(十字) 표시를 한 돌을 묻도록 했다[『영조실록』 33년 5월 13일]. 정성왕후는 승하한 지 약 4개월 만인 6월 4일에 안장되었다[『영조실록』 33년 6월 4일].

홍릉은 명릉과 익릉 곁에 조성되었는데, 그 북쪽 골짜기 너머에는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이 있고 남쪽에는 세조의 아들이자 사후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능인 경릉(敬陵)이 있다. 그래서 홍릉이 조성된 이후부터는 이 5개의 능을 ‘서오릉(西五陵)’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하나 넘어가면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무덤인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조성 상황]
홍릉이 자리 잡은 곳은 조선초기부터 왕릉이 들어선, 이름난 길지였다. 18세기 초에는 숙종과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 조성되었으며, 언덕 너머에는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무덤인 소령원이 있었다. 영조가 이곳에 홍릉을 조성한 것은 자신의 부친인 숙종과 모후 인경왕후, 그리고 생모인 숙빈최씨의 무덤을 가까이에 두어 후대의 왕들이 이곳을 두루 참배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조가 처음 홍릉에 전배한 것은 이듬해인 1758년(영조 34) 1월 26일이었는데, 봉심·작헌례·재배례 등을 행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소령원에도 들렀다. 이후 영조는 여러 차례 친제를 행하였으며, 그때마다 명릉, 익릉 및 소령원에도 나아가 절을 올렸다.

영조는 왕실의 상례가 조선초기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며, 아울러 제사 의절을 간소화하려 하였다[『영조실록』 33년 8월 10일]. 그래서 홍계희(洪啓禧)에게 명하여 1758년(영조 34)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편찬하였다. 그런데 홍릉은 바로 그 전해인 1757년(영조 33)에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홍릉 조성을 담당한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提調)는 다름 아닌 홍계희였다. 따라서 홍릉은 영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검소하게 조성되었다. 각종 석물은 이전에 비해 크기를 줄였으며, 봉분 주변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정자각의 경우, 대신들이 인근에 위치한 명릉과 익릉처럼 정전 3칸과 좌우 익각(翼閣), 배위청 3칸 등 총 8칸 규모로 건립할 것을 청하였으나, 창릉의 예를 따라 5칸으로 조성하게 하였다. 또한 당초 영조의 사후에 쌍릉으로 조성할 것을 염두에 둔 까닭에 곡장을 넓게 설치하고, 양석(羊石), 호석(虎石)을 비롯해 문인석과 무인석도 모두 넓게 배치하였다.

[변천]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승하하자, 처음에는 홍릉에 능을 마련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곧 소령원 부근 등 다른 장소를 물색하다가, 결국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동쪽의 옛 영릉 자리로 결정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 영조 자신이 준비해 둔 자리를 택하지 않고 다른 곳에 능을 조성한 것은 당시에 생존해 있던 정순왕후의 존재를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순왕후는 1805년(순조 5) 승하한 뒤 영조와 함께 원릉에 묻혔다. 그 결과 홍릉의 오른쪽 자리는 빈자리로 남았다.

홍릉은 애초 계획과 달리 정성왕후 한 사람만 안장되었으나, 같은 권역에 명릉, 익릉 등이 있어서 서오릉으로 불리며 이후 왕들이 자주 참배하는 능이 되었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세 차례 이상 홍릉을 참배했으며, 그 뒤 순조, 철종, 고종도 이곳을 방문하였다. 서오릉에는 조선시대에 모두 5개의 능과,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묘인 순창원(順昌園)이 있다.

[관련 사항]
홍릉을 포함한 서오릉은 1970년 5월 26일에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20세기에는 몇 개의 능원이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1969년에는 경종의 생모 장희빈(張禧嬪)의 묘인 대빈묘(大嬪墓)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고, 1970년에는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던 수경원(綏慶園)이 옮겨졌다. 수경원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이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정성왕후]산릉도감의궤([貞聖王后]山陵都監儀軌)』
■ 『홍릉지(弘陵志)』

■ [집필자] 이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