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위치하여 달이 태양 빛을 일부 혹은 전부 가리는 천변(天變) 현상.
[개설]
일식(日食)은 벌레가 야금야금 갉아먹듯 태양을 잠식한다는 뜻에서 일식(日蝕)이라고도 한다.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일직선으로 위치할 때 일식이 발생한다. 지구 표면에서 보이는 태양과 달의 겉보기 크기 곧 시직경은 0.5°로 거의 같다. 또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황도(黃道) 궤도면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백도(白道) 궤도면이 서로 거의 일치한다. 때문에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이 때로 태양의 앞면으로 와서 태양을 가리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 일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달이 태양의 반대편으로 와서 지구 그림자에 들어가 달이 가려지면 월식이 발생한다. 실제 천체 크기로는 태양이 지구 지름의 109배이고 달은 지구의 4분의 1 크기여서 태양이 달보다 대략 400배 이상 크다. 하지만 상대 거리가 태양과 지구는 약 1억 4,960만 킬로미터이고, 지구와 달은 38만 4,403킬로미터여서,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는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약 400분의 1에 해당한다. 이처럼 상대 크기와 상대 거리가 반비례하여 지구에서 보이는 두 천체는 실제와 달리 거의 비슷한 크기로 보이고, 이러한 이유로 일식과 월식이 가능해진다. 천체의 신비라 이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일식은 달의 그림자가 지구면에 드리워지는 지역에서 관찰되는데, 일식이 최대로 진행하였을 때의 상태에 따라 네 종류로 나뉜다. 첫째, 달의 본그림자[本影] 지역에 있는 관측자는 달의 각 크기가 태양의 각 크기보다 크거나 같아 달이 태양면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全食]을 볼 수 있고, 둘째, 달의 반그림자[半影] 지역 관측자는 일부가 가려지는 부분일식[偏食]을 보게 된다. 셋째, 달의 타원궤도 운동으로 지구에서 달의 거리가 더 멀어져 본영이 지표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때 본영의 원뿔이 연장된 곳에서는 가락지처럼 해를 가리는 금환일식[環食]이 관찰된다. 이때는 달의 각 크기가 태양의 각 크기보다 작아 달이 태양의 내부로 완전히 들어가는 경우이다. 넷째, 달의 각 크기가 태양의 각 크기와 거의 같아 지역에 따라 개기일식은 7분 31초, 금환일식은 12분 24초가 최장이다. 개기일식은 지구 표면 전체에서 약 18개월에 한 번씩 일어나며, 한 해 동안 적어도 2회, 많으면 5회까지 발생될 수가 있고, 특정 지역에서 개기일식이 다시 일어날 확률은 평균 370년에 1회 정도이다. 달의 궤도인 백도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궤도인 황도보다 약 5° 기울어져 있어 일식과 월식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와 달과 태양이 일직선 상에 놓이고 태양이 교점에서 일정한 각도 범위인 일식한(日食限) 내에 있을 때 발생하는데, 이때가 지구 상에서는 매월 그믐날이나 초하루 무렵이다.
『천문류초(天文類抄)』에서는 달이 29일 53분을 운행하면 태양과 상회(相會)하는데 이를 합삭(合朔)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또한 초하룻날에 달이 황도와 교행(交行)하면서 태양이 달에 가려지는 것을 일식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일식은 음(陰)이 양(陽)을 이기는 것이므로 그 변고를 중대하게 여기니 예로부터 성인이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일식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때 『논어』의 “북진성(北辰星)이 그 자리에 있어 뭇별들이 아우른다.” 하는 장을 강론하는 경연에서 왕이 일식은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고 묻자, 시강관 전백영(全伯英)이 “인사(人事)가 아래 사람들을 감읍시키면, 하늘은 실상 위에서 감응하는 바입니다. 부처가 말한 아수라왕(阿修羅王)의 일은 그릇된 것입니다.” 하고 답변하였다[『태조실록』 7년 12월 14일]. 일식을 유교적인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징표로 인식하고, 불교의 관점은 잘못된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태종 때에는 범일(泛日)에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에 앞서 서운관에서 징벌의 두려움 때문인지 이달 초하루 갑신(甲申)일은 비록 범일이라 하더라도 일수(日數)의 천수(千數)가 모두 공(空)이라 일식할지 안 할지 헤아리기 어렵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보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범일은 일식·월식을 추보할 때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범위의 날을 이른다[『태종실록』 12년 7월 1일].
세종은 서운관(書雲館) 정(正) 박염(朴恬) 등에게 명하여, 삼각산(三角山) 꼭대기에 올라가 다음 날 일식이 있을지 없을지 살펴보라고 하였다. 『수시력(授時曆)』과 『선명력(宣明曆)』에 따라 계산하면 다음 날 인시(寅時)와 묘시(卯時) 즈음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예보되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이른 새벽이라 평지에서는 살펴볼 수가 없고, 산꼭대기에서는 일출 시 일식 여부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 10년 3월 30일].
과거에는 일식·월식을 두려운 천변이라고 인식하였다. 세종 때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한 글을 보면, 일식·월식은 천변 중에 큰 것이니 마땅히 음악을 중단하고 형륙(刑戮)을 그치며 짐승의 도살을 금하고 조회(朝會)와 시장(市場)을 정지하여 천변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이라고 지시하였다[『세종실록』 13년 12월 20일]. 사흘 뒤인 12월 23일에는 이에 대한 조치로 예조가 당나라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따라 매번 일식·월식을 만나면 조회를 정지하고 음악을 끊으며 형륙을 없애고 짐승의 도살을 금한다는 법식을 정하였다.
일식·월식 예보로 인해 행사의 날짜를 옮기기도 하였다. 세종 때 예조에서 올린 정문(呈文)에 따르면, 8월 1일 상정(上丁)일이 문선왕(文宣王) 공자의 석전제가 있는 날이나 또한 일식이 있는 날이기도 한데, 원나라 순제의 『지정조격(至正條格)』과 『당육전(唐六典)』에서는 “석전제가 있을 때 대사(大事)를 만나면 상정일을 고쳐서 중정(仲丁)일에 제사 지낸다.” 하였으므로 석전제의 날짜를 8월 11일 정해(丁亥)일로 옮기자고 하였다[『세종실록』 21년 7월 18일].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