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유성(流星)

서지사항
항목명유성(流星)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객성(客星)
분야문화
유형자연(현상)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우주를 떠다니던 작은 물체나 티끌 등이 지구 대기권으로 들어오면서 대기와의 마찰로 불타면서 빛을 내는 별똥별.

[개설]
별똥별로 불리는 유성(流星)은 혜성(彗星)이나 소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티끌이나 태양계 공간을 떠돌던 우주 먼지 등이 지구 중력에 붙잡혀 대기권으로 들어오면서 공기와의 마찰로 불타는 것을 이른다. 유성이 빛을 발하는 시간은 수 초에서 수십 분의 1초 사이로 순식간이다. 유성이 다 타버리지 않고 지상에 떨어진 것을 운석(隕石) 혹은 성운(星隕)이라 하며, 운석은 보통의 유성보다 더 밝고 땅에 떨어질 때 큰 소리를 내므로 신비하고 두려운 현상으로 인식하였다.

[내용 및 특징]
유성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을 유성우(流星雨)라 한다. 혜성이나 소행성들이 타원궤도를 그리며 지구의 안쪽 궤도로 진입할 때, 지나간 자리에는 이 천체들에서 나온 많은 잔해들이 남는다. 지구가 공전하다가 이 자리를 통과하면 그 잔해들이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대기권으로 들어오면서 무수한 유성이 되어 쏟아지는데 이것을 유성우라 한다. 매년 서너 차례 유성우가 내리는데, 유명한 유성우로는 핼리혜성과 연관된 물병자리와 오리온자리 유성우가 있고, 엥케혜성과 연관된 황소자리 유성우 등이 있다.

『송사(宋史)』에서는 유성을 하늘의 사신[天使]으로 묘사하였고, 별이 크면 큰 사신(使臣), 작으면 작은 사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기일이 촉박한 사신,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기일이 급하지 않은 사신이라고 보았다. 또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은 간사한 사신이고, 빠르게 가버리는 것은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신이라고 하였다. 꼬리가 긴 것은 일이 오래 걸리고, 짧은 것은 빨리 끝나며, 앞이 크고 뒤가 작으면 근심스런 일이고, 앞이 작고 뒤가 크면 기쁜 일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또 별이 크면서도 빛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衆人]의 일을 가져오고, 작으면서 빛이 있으면 귀인(貴人)의 일을 가져오며, 크면서 빛이 있는 것은 귀인과 대중들의 일을 가져온다고 보았다. 『천문류초(天文類抄)』에도 여덟 종류의 유성을 수록하고 있으나, 『송사』와 달리 천사 대신에 분성을 넣었고, 천휘 대신에 소유성(小流星)을 넣었다. 여기서 소유성은 지금의 유성우와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유성은 1393년(태조 2) 기록부터 시작하여 수천 건에 달한다. 유성이 낮에 나타났으며 크기가 병(甁)만 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태조실록』 7년 11년 16일 1번째기사], 이것이 이른바 낮에 떨어지는 유성인 영두(營頭)에 해당한다. 햇무리가 지고, 밤에 유성이 자미원(紫微垣) 남문에서 나와 축(丑) 방위로 들어갔는데 그 형상이 됫박[升]과 같았다 하였는데 이를 성변(星變)으로 기록하고 있다[『세종실록』 1년 7월 4일]. 해 뜰 때에 유성이 서북에서 나와 동북을 향하여 가로로 떨어졌는데 형상이 큰 배[梨] 덩어리 같았고 빛이 희고 꼬리 길이가 서너 척(尺) 남짓 되었다고 묘사하였다[『세종실록』 15년 8월 6일]. 유성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동남방으로 들어갔고, 혜성이 위치를 옮겨 누성(婁星)의 궤도 안쪽 동북방에 나타났다고도 하였다[『숙종실록』 3년 4월 2일]. 유성의 크기와 형태, 이동 경로와 위치, 길이와 색깔 등 매우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관측 기록을 남긴 점이 주목된다.

금성이 목성을 범하였고, 유성이 태미원(太微垣) 동쪽 담장의 상장(上將)에서 나와 고루(庫樓)로 들어갔는데, 크기가 됫박만 하고 그 빛이 청황색이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왕이 서운관 승(丞) 박염(朴恬)을 불러 유성은 어떤 별인가를 묻자, 병거(兵車)를 맡은 별이라 대답하였다. 다시 왕이 그 응험은 어떤 것인가 묻자, “유성이 크면 사신이 크고, 유성이 작으면 사신이 작은 것이오니, 조정(朝廷) 사신이 도래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였다. 이를 듣고 왕은 『문헌통고(文獻通考)』를 가져다가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에게 역대 성변에 대한 일을 두루 찾아보고 아뢰도록 명하였다[『태종실록』 5년 3월 3일]. 여기서 유성의 크기로 사신의 비중을 논한 것은 『천문류초』의 점성적 해석과 동일한 인식이어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

■ [집필자] 김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