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서운관(書雲觀)이란 명칭은 700여 년 전인 1308년(고려 충렬왕 34) 6월에 기존의 사천감(司天監)과 태사국(太史局)을 합병하면서 새로 붙인 이름이다. 조선후기 관상감 관원 성주덕(成周悳)이 관서지(官署志)로 편찬한 『서운관지(書雲觀志)』에서는,『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춘분(春分)·추분(秋分)·하지(夏至)·동지(冬至)가 시작되고 끝날 때 반드시 그 풍경[雲物]을 기록[書]한다.” 하는 구절에서 서운관이란 이름을 따왔다고 하였다.
[담당 직무]
서운관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까지 쓰인 공식 이름이며, 세종 때에는 관상감(觀象監)으로, 조선말인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에는 관상소(觀象所)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서운관이란 말은 사라지지 않고 관상감의 별칭으로 널리 쓰였으며, 관상감의 관서지를 편찬할 때도 『서운관지』라고 하여 서운관을 이름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조선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서운관이라 하였고, 천문과 지리, 역수(曆數)와 점주(占籌), 측후와 각루(刻漏)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이 중 점주는 택일과 명과에 관련한 일을 맡았다.
조선 개국 초에 서운관이 수행한 일을 살펴보면, 왕이 서운관 관원을 불러 종묘를 지을 땅을 물었다. 1393년(태조 2) 2월 10일에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 권중화(權仲和)가 새 도읍의 종묘와 사직, 궁전과 조시(朝市)를 만들 지세도(地勢圖)를 바쳤다. 왕은 서운관과 풍수학자인 이양달(李陽達)·배상충(裵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면(地面)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김사행(金師幸)에게 명하여 먹줄로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30일]. 또한 좌시중 조준과 영삼사사 권중화 등 11명을 보내어 서운관의 원리(員吏) 등을 거느리고 풍수 비결서인 『지리비록촬요(地理秘錄撮要)』를 가지고 무악(毋岳) 남쪽으로 가서 천도할 땅을 살펴보도록 하였다[『태조실록』 3년 2월 18일]. 이렇게 개국 초에 서운관은 새 왕조의 도읍지 선정과 종묘사직의 건립 등 제반 도읍 건설에 있어 핵심 부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왕조실록』 문무백관의 관제에 따르면 서운관은 천문의 재앙과 상서로움[災祥], 역일(曆日)을 택일하는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직제로 판사(判事) 2명, 정(正) 2명, 부정(副正) 2명, 승(丞) 2명, 겸승(兼丞) 2명, 주부(注簿) 2명, 겸주부(兼注簿) 2명, 장루(掌漏) 4명, 시일(視日) 4명, 사력(司曆) 4명, 감후(監候) 4명, 사신(司辰) 4명이 있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세조 때의 관제 개정에 따라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장루를 직장(直長)으로 하고, 시일을 봉사(奉事)로, 감후를 부봉사로, 사신을 참봉으로 하였다. 사력은 없애고 판관(判官)·부봉사·참봉 각각 한 명씩을 더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1506년(연산군 12)에는 관상감을 혁파하고 사력서(司曆署)로 관서의 등급을 낮추었으나 그해 중종반정으로 다시 관상감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로는 조선말까지 관상감으로 이어오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관상소(觀象所)로, 다시 1907년(융희 1)에 측후소(測候所)로 바뀌어 근대식 시설이 되었다.
[참고문헌]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 『한서(漢書)』 「천문지(天文志)」
■ 『여씨춘추(呂氏春秋)』
■ 『회남자(淮南子)』
■ 『천문류초(天文類抄)』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일권,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예문서원, 2007.
■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고구려 하늘에 새긴 천공의 유토피아』, 사계절, 2008.
■ 김일권, 『우리 역사의 하늘과 별자리: 고대부터 조선까지 한국 별자리와 천문 문화사』, 고즈윈, 2008.